'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이번 주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려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않았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따뜻한 봄날은 더욱 간절해진다. 사회도 그렇다. 봄은 다가왔지만 각종 총기사고들과 주한 미국대사 피습 등 요즘 들어 자주 발생한 강력사건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다. 정말이지 따뜻한 봄바람이 자꾸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삶의 추위가 풀리지 않는 이때, 한 스님의 책을 읽게 됐다. 해인사 승가대학장인 원철 스님이 지은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는 책이었다. 요즘 서점가는 소위 '힐링 팔이'라 해서 따뜻함을 원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쓴 글과 따뜻한 필체를 가장해 가르침을 강요하는 책들이 난무하는 실정이다. 그 가운데 산문(山門)과 속세를 오가며 바라본 세상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낸 수필집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스님이 보는 세상과 책 속에서 강조하는 '중도'(中道)라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지난 10일 무작정 연락을 넣고 해인사로 향했다. '출발한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낸 기자에게 원철 스님의 답문자는 이러했다.
"알겠습니다. 이따 봬요! 바람과 냉기로 가야산이 차갑습니다."
◆'중도'에 대한 오해를 풀자
"사람들이 '중도'라고 하면 '딱 중간' '특정 사안에 대해 아무 말 않는 회색분자' '양시론'양비론을 주장하는 사람' 등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엉거주춤한 행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중도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그 의미와는 다릅니다."
원철 스님의 책에는 '중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원철 스님은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 소재를 '중도'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 스님이 말하는 '중도'란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가장 적절한 대안을 제시해 양쪽의 논리를 모두 수용하는 제3의 논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봄동'이라는 나물의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을까를 고찰하는 대목에서 원철 스님은 "봄동의 맛은 그 나물이 겨울을 버리지 않고 버틴 덕분에 느껴지는 봄의 맛"이라며 "'겨울'과 '봄'이라는 어찌 보면 양 극단의 기후를 모두 품어내야 나오는 맛이기에 봄동의 맛은 중도의 도가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원철 스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보수와 진보, 부자와 빈자, 영남과 호남 등으로 갈라져 서로 "자기의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대한민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중도'는 변증법의 동양적인 변형이면서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제가 책을 쓰게 된 이유도 중도를 관념적'이론적으로 설명하다 보면 일반적인 신도들은 지루할 수도 있죠. 게다가 사례가 없으니 설명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례를 모으다 보니 책이 한 권 나왔네요."
◆우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에 실린 글 중에는 세상을 떠난 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법정 스님, 지관 스님 등 불교계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스님들의 입적 때 조사(弔詞)를 썼고, 도반(불가에서 함께 수행하는 벗, 친구)인 성묵 스님의 입적과 건축가인 정기용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별세 때도 그를 추모하는 글을 썼다. 원철 스님은 "불교계나 지인들이 급하게 조사 쓸 사람을 구할 때 '글 품질이 담보가 된다'는 이유로 내게 청탁을 해왔고, 그에 맞춰 성실하게 써준 것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스님의 조사에는 망자(亡者)에 대한 스님의 추억이 절절하다. 그래서일까, 조사를 쓰는 동안 스님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글을 쓰면서 결국 삶과 죽음은 둘로 구분할 수 없는 존재란 생각이 들었어요. 어찌 보면 우리의 인생이란 것이 결국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원철 스님은 조사를 쓰면서 생긴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에 대해 "결국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내일은 다가오긴 하지만 실체는 없습니다. 오늘은 어제의 결과고, 오늘은 내일의 결과가 될 것입니다. 결국 하루하루를 삶에 대한 숭고한 의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죠."
◆산과 도시가 다르지 않더라
원철 스님이 해인사로 오기 전에는 서울의 조계사에서 수행을 했다. 책에는 조계사 수행 시절의 경험담과 더불어 속세와 산문을 오가면서 스님이 겪은 재미있는 일화들도 실려 있다. 책을 보면 스님도 내부 문서 작성에 고민하기도 하고, 관용 소형차를 몰면서 기름값을 걱정하고, 심지어는 현금카드 해킹도 당한다.
"저도 맨 처음 출가할 때는 산에서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법랍이 쌓이니 도시 안에도 절이 있고, 그곳에는 그곳에 걸맞은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이라고 시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고, 도시라고 정신이 사납기만 한 것도 아니지요. 관광객이 몰리면 산사도 시장통처럼 북적대고, 도시도 휴가철엔 적막에 휩싸이니까요.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위치에 있더라도 스님답게 살고 있는가'라는 것이었지요."
속세와 산문을 오가는 스님의 생활은 스님이 줄기차게 탐색해 온 '중도'의 도와 맞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속의 공간과 종교의 공간을 양분하지 않고 어느 위치에 있든 불가수행자의 도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원철 스님은 차와 함께 커피를 잘 내리는 스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스님을 찾는 신도들이 차와 함께 커피를 찾기에 시도한 것인데, 지금은 신도들이 커피를 더 많이 찾을 뿐만 아니라 커피콩을 선물해 줄 정도로 커피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원철 스님은 커피에서도 중도의 도를 발견했다.
"커피 볶는 기계의 국산화에 성공한 기업이 있는데, 알고 보니 방앗간의 깨 볶는 기계를 만들던 곳이었어요. 거기서 기계를 살펴보니 커피 볶는 기계와 깨 볶는 기계의 원리가 크게 다르지 않더라는 거죠. 스님 중에는 그라인더 대신 한약방에서 쓰는 갈돌을 이용해 원두를 분쇄하는 방법을 고안한 분도 있어요. 커피는 무조건 서양의 도구를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동'서양의 방식을 조율해 커피를 만드는 방법에서 중도의 도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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