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 척결·지방자치·금융실명제 등
김영삼 대통령 업적 외환위기에 묻혀
노태우정부 북방외교·신도시건설 호평
불통 구조로 만든 청와대 신축은 큰 실책
한국갤럽이 2014년 13세 이상 한국인 1천700명에게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을 물은 결과를 발표했는데, 노무현(32%), 박정희(28%), 김대중(16%), 박근혜(5%), 이명박(3%), 전두환(1.9%), 김영삼(1.6%), 노태우(0.8%), 이승만(0.8%) 순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2004년 조사에서는 박정희(48%), 김대중(14%), 노무현(7%)순서였다.
갤럽의 조사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2004년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던 진보정권 2기였기에 진보에 대한 피로감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우호도 결집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2014년은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진 보수정권 2기였기에 이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노무현, 박정희, 김대중 순서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어느 경우에나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최하위에 머물렀고,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도 비슷한 처지에 있다. 이승만은 장기집권 끝에 학생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는 수난을 당했으니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이다. 노태우는 비자금 때문에, 그리고 김영삼은 외환위기 때문에 이렇게 박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 조사는 일반인을 상대로 한 '좋아하는 대통령'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다. 만일에 전문가를 대상으로 '훌륭한 대통령'을 물어보는 조사였다면 결과는 사뭇 다를 수 있다. 전문가들을 상대로 '훌륭한 대통령'에 대해 물어본다면 건국과 6'25라는 힘든 과정을 극복한 이승만 대통령이 상위권에 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에서는 역사학자를 상대로 역대 대통령 중에서 훌륭한 대통령을 물어보는 조사가 신빙성을 얻고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을 대체로 훌륭한 대통령으로 뽑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기간이 길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대단히 압제적이었을뿐더러 집권 자체가 불법이라는 평가가 있기 때문에 다른 대통령과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그렇다면 1987년 개헌 후의 대통령만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는 것이 공평할 것이다. 일반인을 상대로 '좋아하는 대통령'를 묻는 조사와 전문가들을 상대로 '훌륭한 대통령'을 묻는 조사를 병행하면 보다 객관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다.
1987년 이후 대통령을 상대로 이 같은 설문조사를 한다면 적어도 전문가 집단은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보다 우호적인 평가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민주주의 확립에 평생을 바친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와 지방자치 실시, 12'12 및 5'18 청산 등 혁혁한 업적을 남겼지만 임기 말에 터진 외환위기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리고 말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는 심지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고 비자금이나 챙겼다는 비난을 듣고 있는데, 사실 대통령이 막대한 비자금이나 챙겼다면 더 이상 평가고 뭐고 할 것도 없다.
여기서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무엇보다 '대통령 노태우'와 '노태우 정권'은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노태우 정부 5년간 우리나라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민주주의와 시민참여에 대한 욕구가 폭발했던 시절이었는데,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부응했다는 평가를 들을 만하다. 집값 폭등에 대처하기 위해 곳곳에 신도시를 건설했고, 고속도로와 지하철을 확충했으며 고속전철과 신공항 건설을 기획했다. 소련 등 구 공산권 국가들을 상대로 북방외교를 추진했고, 무역자유화 흐름에 부응해서 1990년대 세계화 시대에 준비했다. 국제수지와 국가재정에서 흑자 기조를 유지해서 김영삼 정부에 인계해 주었다. 당시 우리 국민의 70%는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득 분포가 양호했었다.
그 시기에도 의문사 사건이 생기는 등 인권보호에선 문제가 있었지만, 노태우 정권이 이런 업적을 낼 수 있는 데는 당시의 정치적 환경도 역할을 했다. 노태우 정권 전반부는 여소야대 정국이었고 후반부는 차기 대권주자인 김영삼이 여당 대표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청와대는 국정을 독선적으로 끌고 갈 수 없었다. 당시에는 잘 훈련되고 사명감이 충만한 관료제가 기능하고 있었으며, 청와대에는 노재봉, 김학준, 김종휘, 김종인 등 이름 석 자로 알 만한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해서 힘을 보탰다. 대통령의 취약한 리더십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기능한 셈이다. 노 대통령이 저지른 큰 실책 중의 하나는 청와대 신축이다. 청와대 건물을 너무 권위적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 집무공간과 비서실을 멀리 떨어뜨려 오늘날의 불통을 구조화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중앙대 명예교수
댓글 많은 뉴스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