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정병준 지음/돌베개 펴냄
1955년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최대 정적 박헌영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현앨리스라는 인물을 등장시켰다.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유학 중이던 시절 박헌영의 애인이었으며, 미국 정보기관의 첩자로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을 포섭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었다.
북한은 '박헌영과 현앨리스의 관계는 단순한 간첩망의 연락관계가 아니라, 1920년 상하이 생활에서 조선민족으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신자인 현앨리스를 자신의 첫 애인으로 했으며, (주한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직속 간첩이자 상하이 시절 첫 애인인 현앨리스에게 농락당한 것'처럼 비치는 공판기록을 공개했다. 여러 차례 심문과 재판을 거쳐 박헌영과 현앨리스는 1956년 평양에서 처형됐다. '혁명동지'인 김일성의 손에 의해 처형된 것이다. 현앨리스는 미국의 간첩이었을까?
이 책은 일제시절 독립운동가였던 현순 목사의 맏딸로 제1호 하와이 출생 한국인이자 박헌영, 김단야 등과 독립운동, 재미한인 진보운동에 헌신했던 현앨리스의 비극적 삶과 그 시대를 조명한다. 현앨리스의 개인사에서 출발해 현앨리스와 아들 정웰링턴의 가족사를 거쳐 4세대에 걸친 현씨 집안의 근대사를 다루는 것이다. 이들 가족사를 조명하는 과정에서 재미 한인사, 한국 독립운동사, 한국 현대사, 북한 현대사, 냉전사 등이 시간대별로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박헌영의 첫 애인, 한국판 마타하리 등으로 알려진 현앨리스의 생애를 통해 한 인물의 가족사와 현대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책은 1921년 겨울, 중국에 유학 중이던 한국 학생들이 찍은 단체사진에서 시작한다. 이 사진은 원래 박헌영이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시절인 1929년 각국의 혁명가들과 찍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거의 한 세기 지난 시점에 이 책의 지은이에 의해 사진의 실체가 드러났다. 북한이 주장해온 '박헌영 간첩사건'의 실마리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사진 속에는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 현앨리스, 현앨리스의 동생 현피터 등이 포즈를 잡고 있다. 책은 현앨리스가 박헌영을 포섭하는 역할을 맡았던 스파이가 아니라 현앨리스와 박헌영이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의 꿈을 키워온 오누이 같은 사이었다고 말한다.
박헌영과 현앨리스는 상하이 시절 이후 25년가량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1949년 박헌영은 미군과 정보기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던 현앨리스와 리사민을 북한에 입국시켜준다. 이전에 현앨리스는 서울에서 추방되어 로스앤젤레스로 갔다가, 체코에서 체류하는 등 부초처럼 떠돌고 있었다. 상하이 시절 인연을 계기로 현앨리스와 리사민을 북한에 입국시킨 박헌영은 이들에게 외무성, 조선중앙통신, 조국전선 등의 일자리를 주선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적 박헌영을 제거하려는 김일성에게 빌미가 되었다.
1955년 12월 15일 북한 국가검사는 "하지의 지령을 받고 있던 박헌영은 1949년 정치적 망명객으로 가장하고 미국을 떠나 유럽에 와 있던 미국 간첩 현애리스와 리사민이 미국에서 추방당한 진보적 인사로 은폐하여 입국을 보장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애리스를 중앙 통신사 또는 외무성에 리사민을 조국전선의 중요한 직위에 배치시켜주면서 이들의 간첩활동을 백방으로 보장하여 주었다"고 밝혔다.
책은 박헌영과 현앨리스가 상하이에서 찍은 사진을 시작으로 현앨리스는 간첩이 아니라 시대적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인물임을 보여준다. 현앨리스는 다면적이고 중층적이며 경계적인 인물이었다. 조선인이되 일본의 신민으로 태어나, 미국의 시민, 남한의 국민, 북한의 공민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좌익 혹은 북한 첩자, 북한에서는 미국 스파이라는 정체성을 강요당했다. 그녀는 한국 근현대사 과정에서 파생된 뿌리 뽑힌 존재였으며, 조국을 찾아 방황하는 방랑자, 이방인이었다. 그녀의 삶은 곧 한국 근현대사가 경험한 파국이기도 했다.
지은이는 "처음엔 막연히 현앨리스가 미국의 스파이이거나 박헌영의 애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매혹적인 상상을 했는데, 체코 프라하에서 중요한 문서들을 발굴하고 1921년 박헌영과 현앨리스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하면서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 모자이크를 완성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484쪽, 2만원.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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