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징비록'과 정철의 가사

작년에 우리 집에서는 박시백 화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 20권짜리 한 질을 샀었다. 책이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면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재구성하였기 때문에 중학교에 다니는 우리 집 아이들도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에 흥미를 가지게 되니까 KBS에서 하는 '역사저널 그날'과 같은 프로그램을 찾아보기도 하고, 역사적인 맥락이 이해가 되니까 '정도전'이나 '징비록'과 같은 묵직한 사극을 즐겨보게 되었다. 아이돌 가수에 열광했던 큰딸은 이제 아이돌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지고 대신 '슴메 아저씨'('정도전'에서 이성계 역할을 했던 유동근 씨를 딸은 그렇게 부른다.)나 '그런데 아저씨'('징비록'에서 류성룡 역할을 하고 있는 김상중 씨)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들이 송강 정철에 대해서 이전에는 '시험에 자주 나오는 가사를 지어 21세기에 사는 대한민국 학생들의 정신 건강에 피해를 입히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가, 요즘에는 '어허, 이 사람이'라는 드라마 속 정철(선동혁 扮)의 성대모사를 하는 것을 즐길 정도로 매우 친숙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송강 정철은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성격이 직선적이고 다혈질적인 인물이다.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을 때 선조가 귀양지에 있던 정철을 불러 사건의 처리를 진두지휘하게 한 이유도 바로 그런 성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야 임금을 위한 일념으로 그랬다고 하지만, 동인 세력을 숙청하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정적들을 만들었다. 선조는 정철을 통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동인 세력을 약화시키고 정국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정철은 선조가 내심 귀인 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음에도 눈치 없이 학식과 자질이 뛰어났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했다가 대간들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함평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때 귀양지에서 쓴 가사가 김만중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참 문장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조선 후기 문인들이 글을 쓰는 데 하나의 모범이 된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이다. 그런 맥락들을 이해하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굳이 해석을 하지 않아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엊그제 님을 뫼셔 광한전(廣寒展)에 올랐더니/ 그때에 어찌하여 하계(下界)에 내려온고/ 올 적에 빗은 머리 얼키연지 삼 년일세/ 연지분도 있네마는 눌 위하여 곱게 할꼬/ 마음에 맺힌 시름 첩첩이 쌓여 있어/ 짓나니 한숨이요 지나니 눈물이라.('사미인곡')

학생들은 시험 문제에서 늘 보던 부분이라 '짓나니 한숨이요'가 절로 나올 수 있지만, 사극을 보고 상황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임금의 총애를 받다가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유배지에 온 비통한 마음과 임금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누가 이처럼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 것이다.

 

제 가는 저 각시님 본 듯도 한저이고/ 천상 백옥경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 다 지고 저문 날에 누굴 보러 가시는고/ 어와 너로구나 이내 사설 들어보소/ 내 얼굴 이 거동이 사랑받음직 한가마는/ 어쩐지 날 보시고 너로구나 여기실 새/ 나도 님을 믿어 군뜻이 전혀 없이/ 어리광이야 교태야 어지럽게 하였더니/ 반기시는 낯빛이 예전과 어찌 다르신고.('속미인곡')

두 여인의 대화 형식으로 자신의 신세를 표현한 속미인곡을 읽다 보면 송강 정철이 유배지에 온 상황이 훤히 그려진다. 문학 작품을 통해 역사 속의 인물이 생생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 공부는 문학 공부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고, 문학 공부는 역사를 생생하게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능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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