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강냉이죽을 먹으며 배를 곯았던 배한철(59) 인터컨티넨탈호텔 총주방장은 지금은 매일 소처럼 황소식(?)을 하며 약 300명의 요리사를 진두지휘하는 사령관이다.
한국전쟁 이후 경주 불국사 바로 앞에서 태어난 그는 7남매 중 다섯째여서 새 옷 한 번 사 입은 적이 없다. 집안 형편은 고만고만했다. 할머니가 '넌 농사를 짓고 중학교는 가지 마라'고 할 정도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비진학반으로 혼자 공부했다. 분유'강냉이죽'강냉이빵이 학년별 먹거리였다. 겨우 고교를 졸업하고 입대 전 무작정 상경해 무교동 순댓국, 해장국집 등지를 돌며 1년여 동안 식당 심부름을 한 것이 국내 최고급 호텔 총주방장에 오르는 단초가 됐다.
"퇴직 후에는 바닷가에서 자그마한 식당을 하면서 1주일에 3일만 일하고, 4일은 문을 닫는 여유를 갖고 싶다"는 그로부터 요리의 이모저모를 들어봤다.
-요리는 어떻게 시작했나.
▶고향에서 같이 학교에 다녔던 친구가 권유했다. 중'고교 때 캠핑에서 선보인 내 요리 솜씨를 인정했던 그 친구가 공업고를 졸업하고 울산공단에서 일하다 그만둔 뒤 "공장에 다녀도 비전이 없더라. 경주에 국비 지원 호텔학교가 생겼는데,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1년 동안 호텔 조리, 서비스, 관리 등 3개 분야에 걸쳐 실무를 집중적으로 가르친 일종의 전문대학 성격이었다.
-어떤 경험을 쌓았나.
▶호텔학교 졸업 후 서울 프라자호텔에 들어가 1년 6개월 동안 조리 보조로 일했다. 일은 크게 힘들지 않았지만, 앞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 달에 11만원 받아서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으더라도 장가를 못 갈 판이었다. 결국 1980년대 초반 현대건설에서 리비아 파견 직원을 모집했는데, 조리사 분야에 지원해 달러벌이에 나섰다. 리비아 정부에서 고용한 이탈리아, 폴란드, 현대건설 측 감독관들에게 20개월간 양식을 제공했다.
귀국 후 다시 롯데호텔에 입사했는데, 여기서 5년 동안 경험을 쌓은 뒤 1988년 인터컨티넨탈호텔이 처음 문을 열 때 들어와 27년간 근무하고 있다.
-특별히 자신 있는 요리가 있나.
▶호텔 고객이 다양하고, 취향도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잘 맞춰야 하고, 모든 요리가 가능해야 한다. 굳이 따지자면 양식 코스요리 중 전채요리(애피타이저)와 파스타, 고기류 분야에 자신이 있다.
양식이 전공이지만, '내 나라 요리도 제대로 잘 못하는데, 남의 나라 요리만 해서야 되겠나'란 생각으로 1990년에 야간대학 전통조리과에서 한식을 공부했다.
-외국인들이 특별히 좋아하거나 금기시하는 요리가 있나.
▶아랍인들의 식재료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소'닭'양고기는 먹어도 이슬람 율법에 맞춰 해가 지고 난 뒤 제를 지내고 도살을 한 고기만 찾는다. 이태원에 가면 '할랄'(Halal: 이슬람 율법하에서 무슬림이 먹고 쓸 수 있도록 허용된 제품)만 파는 정육점과 상점이 별도로 있다.
-요리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나.
▶개인적으로 세계요리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적도 있지만, 총주방장으로서 후배들을 훈련시켜 세계요리대회에서 우승한 것이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다. 2008년 우리 팀 4명이 국내대회에서 1등을 한 뒤 '두바이 블랙박스 세계요리대회'에 나가 우승을 했다. 이 대회는 하루 전 박스에 담긴 요리 재료를 공개한 뒤 당일 20여 개국 최고의 팀이 출전해 그 재료로 요리를 선보이는 방식이다.
-요리사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적은.
▶호텔에서 국제행사를 치르거나, 국가적 행사에 요리를 선보였을 때다. 1998년 우리 호텔에서 열린 남북장관회담을 비롯해 핵 안보회의, 아셈회의 등에서 국내외 지도자들에게 요리를 제공하고 평가를 받았을 때 보람을 느꼈다. 2009년 프랑스에서 OECD 회원국 200여 명에게 한식을 선보였고, 같은 해 미국에서 열린 한국전쟁 참전용사 위안행사에서 요리를 제공했다.
특히 우리나라가 OECD 의장국으로서 주관한 2009년 파리 회의에 요리사 5명을 데려가 관자구이, 잡채, 삼계탕, 불갈비 등 한식을 코스화해서 내놓았는데 극찬을 받았다. 현지 기자단들이 "음식 맛이 너무 황홀하고 보기 좋아서 사진 촬영하는 것을 놓쳤다. 한국에 돌아간 뒤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할 정도였다.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요리사가 있나.
▶경주 호텔학교 허덕수 교무과장과 롯데호텔 외국인 주방장 로덜러 씨 등 2명이다. 호텔학교 조리과 대표를 맡아 교육 말미에 과 친구들과 함께 울진 성류굴에 소풍을 간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소문을 듣고 말렸지만, 밀어붙였다. 교무과장이 과대표, 부대표, 총무 등을 불러 경위를 알아본 뒤 모두 퇴학시킬 태세였다. 내가 "다른 친구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내가 주동했으니, 혼자 책임지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당시 교무과장이 나를 퇴학시켰더라면 지금의 총주방장은 없었을 것이다.
요리와 요리사의 자세를 올곧이 배운 것은 롯데호텔에서 3년 동안 같이 일한 스승인 로덜러 씨를 통해서다. 독일계 스위스 국적의 그는 나에게 레시피는 물론 요리사의 몸과 마음가짐까지 두루 살펴줬다. 인터컨티넨탈호텔로 옮긴 뒤에도 중국에서 일하던 그가 직접 찾아와 제대로 적응하는지 살펴줬다,
-요리사로서 가장 힘든 점은.
▶수많은 사람의 입을 어떻게 다 맞출 수 있겠나. 내 자식이 한다면 말리겠다.(웃음)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투숙객들에게 조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침을 맛나게 먹어야 하루 일이 잘 풀리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일찍 조식이 나가기 전 요리를 맛보거나 살펴봐야 한다.
-집에서도 요리를 하나.
▶지금도 김치는 직접 담근다. 3년 전까지 경기도 일산에서 10년가량 배추, 상추, 고구마 등을 직접 농사지었고, 요리도 많이 했다. 이웃집 할아버지가 땅을 빌려줬다. 건축업하는 매형한테 얻은 철골, 코엑스 공사에서 남은 나무 등을 싣고 가 원두막을 직접 짓기도 했다. 요즘은 아내가 주방에 못 들어가게 한다.
-우리나라 음식문화를 어떻게 보나.
▶음식을 먹을 때 재료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농부나 어부의 노고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식당에서 반찬을 적당히 내놓거나 일본처럼 추가 반찬에 대해 비용을 매기는 등 음식물쓰레기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 예약제를 생활화할 필요도 있다.
김병구 기자 kbg@msnet.co.kr
사진 이성근 작가 lily-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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