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순재의 힐링토크] 한국사진의 새로운 길 개척한 사진작가 준초이 씨

"YS·DJ 사진도 거절한 두둑한 배짱…오기·자긍심으로 어려움 이겨내"

준초이 작품 금동미륵보상 반가사유상.
준초이 작품 금동미륵보상 반가사유상.

4년 전 대구의 한 갤러리에서 사진전시회가 열렸다. 전시된 작품은 단 한 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얼굴이었다. 세로 2m, 가로 1.8m의 대형사진 하나가 뿜어내는 기운은 갤러리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많은 이들이 사진을 보며 위로와 힐링을 이야기했다.

준초이(64'본명 최명준) 씨. 대한민국 광고사진의 전설로 불리는 그는 일본 최고학부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뉴욕으로 건너가 한국인 최초로 맨해튼에 개인 스튜디오를 열었다. 1988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가 걸어온 길은 곧 한국 광고사진과 인물사진의 길이 됐다.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 양재역 부근의 준초이 스튜디오를 찾았다. 자그마한 체격에 맑은 눈을 한 그가 웃으며 반겼다.

-웃는 모습이 소년 같다.

"1년 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며 연습한 미소다. 20대 일본 유학 시절 후원자이던 토목회사 회장인 도시코 아주머니가 찌푸린 내 얼굴을 보고 그런 얼굴로 성공할 수 없다며 거울을 던져주었다. 웃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로 잘 웃게 됐다. 웃으니 일이 잘 풀렸다."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웃음이다. 인물사진 찍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가끔이지만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무조건 물 한 바가지를 덮어씌운다. 물세례를 받고 사진 찍은 기업인과 예술인들이 몇 있다.(웃음)

-물을 덮어씌울 수도 없는 사물인 경우는 어떻게 하는가.

"피사체와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제품을 찍을 때면 계속 그것을 보고 만지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래도 미진하면 직접 구입해서 온종일 가지고 논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제품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때 셔터를 누른다."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4월 13일부터 17일까지 해녀전시회를 갖는다. 30여 점 전시할 예정이다. '해녀'의 유네스코 등재를 목표로 하는 전시회다. 최근 동영상 제작도 마쳤다. 고은 선생이 시까지 써주셨다."

-해녀 사진을 찍은 동기가 있는가.

"나는 일찍 큰 집의 양아들로 보내졌다. 2005년 우연히 우도에서 자식을 키우기 위해 사선을 넘나드는 해녀를 보면서 줄곧 내 안에 있던 어머니를 향한 진한 그리움을 알게 됐다. 2013년 1년 동안 제주도에 머물며 해녀를 찍었다. 그동안 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예쁘다는 사람, 돈 많다는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모두를 찍어봤다. 해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루에도 몇십 번 죽음과 마주하는 그들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과 삶이 어디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을 찍었다.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조수미와 정명훈 가족들이다. 조수미는 어떤 어려운 요구도 싫은 기색 없이 포즈를 취해주었고 정트리오의 경우 카메라를 어색해해서 그의 어머니를 모셔 와서 사진을 찍었다. 기업인은 조태권 광주요그룹회장과 황영기 전 KB금융지주회장이 인상 깊었다. 모두 열정이 대단했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런데 이제는 큰 인물이 없다. 다 작다. 점점 그릇이 작아지고 있다."

-왜 대통령 사진은 거절했나.

"김영삼, 김대중 두 분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을 때 정말 기뻤다. 엄청난 명예이기도 했다. 그런데 촬영을 위해 청와대에 갔더니 촬영 장비와 장소가 이미 세팅되어 있고 시간도 10분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 숨이 막혔다. 이런 답답하고 판에 짜인 억압된 곳에서는 일할 수 없다고 했다. 굳이 내가 가서 찍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되돌아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찍었다.

"여러 차례 부탁을 해왔지만 나의 스튜디오가 아니면 안 된다고 버텼다. 결국 의견이 받아들여져 촬영 당일 스튜디오 일대를 통제한 채 촬영했다. 역대 대통령 중 개인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촬영한 것은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배짱이 보통 아니다.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가.

"최고의 작가라는 자긍심이다. 작가는 어디서든 당당해야 한다. 그러나 건방을 떨어서는 안 된다."

-20년 이상 상업광고를 찍다 예술사진을 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광고업계는 돈 주는 사람이 갑이다. 또 광고사진은 생명이 짧다. 1995년 문화관광부가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세계를 빛낸 한국 음악인 대향연'을 위한 아티스트 사진집을 의뢰해왔다. 조수미 신영옥 백건우 장영주 정트리오의 사진집이었다. 인물은 오랫동안 해오고 싶었던 터라 이를 계기로 인물사진에 집중하게 됐다."

-인물사진과 광고사진의 차이점은.

"특별한 차이점은 없다. 광고사진은 눈으로 사물을 이해했다면 인물사진은 가슴으로 찍는다는 정도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나이가 주는 변화일 수도 있다. 인물사진은 결국 나를 찾는 과정이었다. 또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다."

-사진 작업 자체가 극심한 스트레스일 것 같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그런 빛과 환경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크다. 나는 '다음에'라는 말을 싫어한다. 인생도 다음에 뭐가 전개될지 예상하는 것도 싫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스트레스를 물리치는가.

"너무 힘들어 프로젝트가 취소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웃음) 스트레스를 주는 모든 환경과 한판 붙어 이겨보려는 오기로 극복하고 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사진 촬영도 어려움 속에서 진행됐다고 들었다.

"반가사유상은 '백제'프로젝트 사진 중의 하나였다. 반가사유상을 처음 대할 때 감동은 큰데 표현이 잘 되지 않았다. 물레를 만들어 그 위에 얹어놓고 돌려가며 보았다. 부여박물관 안이어서 찍을 수 있는 시간도 제한돼 있었다. 모든 제약이 옥죄어 폭발해버릴 것 같은 그 순간, 그것들을 박차버렸다. 그러자 반가사유상은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셔터를 눌렀다."

-당신의 유물사진은 지금까지 본 것과 다르다. 보통 유물을 찍으면 전체를 찍지 않는가.

"광고사진을 하며 익힌 강력하고 직선적으로 대상의 본질을 끌어내는 힘에서 나온 듯하다. 가장 강력한 부분을 클로즈업하는 것이다."

-2010년 '백제'를 찍어 백제문화를 크게 알렸다, 신라가 더 매력적인 문화재 아닌가.

"백제를 하고 나니 신라가 하고 싶었다. 그래서 경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신라를 포기했다. 공무원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당신이 있게 한 비결은.

"헝그리 정신이다. 그리고 완벽주의다. 사람들은 내가 일하는 방식을 보면서 저렇게 하면 나도 잘 찍을 수 있겠다고 한다. 사전에 철저한 준비와 연구만이 차별화할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도움과 관심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이젠 남을 도우며 살고 싶다."

-남을 돕는다는 의미는.

"이 세상 에너지는 골고루 나눠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에너지가 있는 곳에 물꼬를 터서 다른 쪽으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재능을 그렇게 사용하고 싶다."

-한국에서 낙제생이었다. 그런데도 성공했다.

"나는 도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날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친구를 보자 오기가 발동했다. 그 친구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선진국의 기술을 빨리 배우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 유학을 결심했다. 그 당시 유학은 무모할 정도의 어려운 도전이었다. 1975년 문이 열렸다. 기적이었다."

-일본에서 4년 장학생이었다. 한국의 꼴찌 학생이 어떻게 장학생이 될 수 있었나.

"학생을 대하는 일본 교수들의 진실 되고 성실한 태도에 감동해서 공부하게 됐다(웃음). 또 세계 최고의 사진작가가 되겠다는 목표가 공부를 하게끔 만들었다."

-한국에서의 교수 제안을 뿌리치고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 깃발을 꽂고 싶었다. 그래서 제안을 거절하고 1982년 뉴욕으로 날아갔다. 그 당시 뉴욕에는 700여 명의 사진가들이 모여 있는 정글이었다. 노력한 결과 2년 만에 '준초이 포토그래피'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런데 전화가 오면 반가워야 하는데 무서웠다. 영어 때문이었다. 영어는 너무 어려웠다."

-결국 '스트레스성 구토'라는 병을 얻었다.

"마늘 냄새 풍기지 않으려고 김치도 금요일 저녁에만 딱 한 번 먹으면서 노력했지만 더 이상 뻗어나가질 못했다. 극심한 좌절감과 스트레스로 금요일만 되면 24시간 내내 토하게 됐다. 힘들어하자 올림픽이 끝나면 한국에 새로운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미국 친구들의 권유로 한국에 왔다. 패잔병처럼."

-한국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1988년 그 당시 한국은 나의 작품 스타일에 놀라고. 하루 비용을 정확히 청구하는 미국식 계산법에 놀랐었다. 포트폴리오(작품집)라는 개념도 없을 때였다. 내 퀄리티로 나를 인정받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우직하게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았다. 올림픽 다음해부터 경기가 좋아졌고 기업인들이 글로벌한 감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젊은이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것 같다.

"한국은 나라가 작아서 파이가 작다. 이것을 서로 나누어 먹으려 하지 말고 눈을 밖으로 돌렸으면 한다. 그리고 겸손하되 당당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스티븐 호킹을 찍고 싶다. 또 러시아의 푸틴 같은 카리스마 있는 사람과 카메라를 앞에 놓고 한판 붙어 보고 싶다. 하하."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이성근 lily_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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