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꿈꾸는 인문학] 말하지 못함과 말하지 않음

스물여덟 자의 글자로 세상의 말을 모두 쓸 수 있으나 쓰지 못할 말이 있으니 바로 말없음이다. 말없음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니 말하고자 하나 말하지 못함과 말할 수 있으나 말하지 않음이다.(이정명의 '뿌리 깊은 나무' 중에서)

새해를 맞아 화순 운주사를 다녀왔습니다. 엄청난 폭설 속에서 그 먼 곳으로 떠난 이유는 운주사에 계시는 와불을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운주사 와불이 벌떡 일어나는 꿈을 오랫동안 꾸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운주사 와불이 일어나는 순간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한나절이나 와불 곁에 머물렀던 내가 깨달은 것은 와불이 일어서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산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곳에서 와불이 일어선다는 것은 산이 무너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와불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어난다면 산 전체가 무너지는 불행이 발생합니다. 오히려 언젠가는 일어설 거라는 믿음, 그것이 더욱 소중한 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믿음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말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수많은 말보다 더 절실하게, 또는 절박하게 내 안의 마음들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답답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편한 시간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내 안에는 오히려 수만 개의 문장들이 흘러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말을 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말하지 못함'과 '말하지 않음'입니다. '말없음'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되지만 그 둘의 거리는 엄청나게 멉니다. '말하지 못함'은 말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사회적 조건들로 인해 말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말하지 않음'은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사회적 이유로 말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말과 글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생각의 지도들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나름대로의 풍경으로 외부에 나타납니다. 언어는 말이나 글로 이루어진 개념의 덩어리입니다. 내 안의 모든 마음을 언어로 드러내지 못할 뿐더러 듣는 사람, 보는 사람의 개념화에 따라 생각의 지도를 다시 다양하게 그려냅니다. 그러한 상황을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텍스트는 외부의 주름'이라는 멋진 말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외부란 '나'라는 텍스트를 제외한 모든 사람, 사회, 상황, 사건들이겠지요. 그것이 두려울 때도 많습니다. '나'라는 텍스트가 외부와 만나면 나름대로의 변형을 겪습니다. 그 변형은 온전히 나의 몫이 아니기에 더욱 위험합니다. 그러한 현상을 탓할 수는 없는 거지요. 오히려 가장 소중한 진실은 '나'와 '외부'의 사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니까요.

굳어진 텍스트 중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절'이라면 '중'은 바로 나를 지칭하는 것이겠지요. 그 말은 그 공간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제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절이라는 이름을 지닌 건물이 있다고 모두 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에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을 실천하는 중이 있어야 합니다. 그 중이 바로 절의 진정한 주인인 것이지요. 절이 싫다고 중이 다 떠나면 이미 절이 아닌 것이지요. 특히 그 절을 중이 너무나 사랑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는 남아서 절을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절이 제대로 절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