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어업인의 날'은 수산업법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어업인의 위상을 확립하고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만든 기념일이다.
어업인의 날은 1969년 4월 1일 제정돼 1997년 바다의 날(5월 31일)에 어업인이 참여하는 형태로 변경됐다가 2011년 공포된 수산업법에 관련 규정이 추가돼 39년 만에 부활됐다.
해양수산부는 1일 전남 여수에서 4회 어업인의 날 기념식을 갖는다. 경북도는 5월 31일 바다의 날 행사와 함께 어업인의 날 행사를 울진에서 함께 열기로 했다.
김대호 기자 dhkim@msnet.co.kr
◆오징어 전구 30만원? 공동구매 새 빛 밝혀…'젊은 도전자' 연규식
"바다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잔잔하게 모든 것을 내어주다가도 어느 순간 사납게 돌아서거든요. 항상 내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연규식(55) 전 구룡포수협 조합장은 어부의 아들이다. 오징어잡이 어선을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어릴 때부터 바다를 배웠다.
"아버지는 오징어 채낚기 어선을 운영하던 선주였어요. 매일 험한 바다 일에 녹초가 되곤 하셨죠. 저도 이렇게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가고 있으니 핏줄의 힘이 무섭죠."
대학 2학년, 오랜 객지생활로 건강이 나빠지자 그는 학업을 중도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바다에 평생을 바치자'고 결심하며 아버지를 졸라 어선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포항대학 해양자원환경관리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바다를 공부했다.
"그때는 기존 나무선박이 철강선박으로 바뀌는 과도기였죠. 여전히 일본식 속어와 옛날 방식을 쓰던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도태되곤 했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했습니다."
1985년. 25세의 나이에 거금 2억3천만원을 대출받아 처음 자신의 배를 만들었다. 동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인 154t급 오징어 채낚기 어선이었다. 기왕 시작하는 거 배짱 좋게 저질러보자는 심사였다. 그러나 갓 어업 일을 시작한 그에게 바다는 녹록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업 관련 사업의 불합리한 유통구조가 그를 가장 힘들게 했다.
"오징어 채낚기는 보통 한 선박에서 100개 정도의 집어등을 켜요. 그런데 이게 전구 하나당 30만원이나 했어요. 수입품이라 비쌀 수밖에 없다고 해도 정작 원산지 가격은 5만원밖에 안 돼요. 1년에 최소 2번 정도는 전구를 갈아야 하는데 말도 안 되는 낭비였어요."
그는 수협중앙회를 찾아 현지 공동구매를 통해 어업부품의 단가를 낮추자고 건의했지만, 수협중앙회에서는 '지역 단위수협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오히려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강릉에서부터 울릉도까지 직접 발품을 팔며 동의서를 받았다.
처음에는 지역 부품 납품업자들의 눈치를 보던 단위수협들도 결국 손을 들었다. 현재 어업 관련 부품들은 수협중앙회 차원에서 대부분 공동구매하고 있다. 한 젊은 어업인의 무모한 도전이 우리나라 어업산업을 바꾼 것이다.
그는 2006년 10월 46세의 젊은 나이에 70여%의 압도적 지지로 구룡포수협 조합장에 당선됐다. 이후 8년간 구룡포 어업 발전을 위해 힘쓰며 지난해 10월 연임을 과감히 포기하고 아름답게 퇴장했다. 조합장 은퇴 후에도 그는 불가사리 등 해적생물(害敵生物)을 활용한 자원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신제품이 히트를 치면 구룡포에서만 팔 겁니다. 제 제품이 지역 관광산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말이죠. 주민 모두가 주주인 사회적기업을 만들어 우리 이웃들이 바다를 통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포항 신동우 기자 sdw@msnet.co.kr
◆전복 양식 서해 독점? 포항서도 잘 자라요…15년 연구 '여든의 쾌거' 김병관
"동해안이 전복 양식 불모지라고요? 아니죠. 우리나라 최고 전복 명산지가 될 겁니다."
전복은 경북 동해안의 대표 어종은 아니다. 수심이 너무 깊고, 파도 등 해류가 거세 전복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포항을 비롯해 경북의 전복식당들은 대부분 해상 양식이 활발한 서'남해안에서 전복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최근 동해안에서 전복 해상 양식을 성공한 어업인이 있어 화제다. 그것도 여든에 가까운 나이를 잊고 이룩한 쾌거다. 김병관(79) 모포수산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제 고향이라서가 아니라 동해안은 정말 청정한 바다에다 어류가 생활하는 데 최고의 조건을 갖고 있어요.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일이죠."
포항 남구 장기면 산서리가 고향인 김 대표는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밑에 2남 7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항일시위 중 귀를 다쳐 청력을 잃은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그에게 '커서 내 눈과 귀 같은 사람이 돼달라'고 당부했다. 선친의 이 말은 평생의 신념이 됐다고 한다.
부산동아대학 기계과 3학년 때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중퇴한 그는 이후 대선조선 등에 취업해 바다를 배웠다. 그는 1979년 고향으로 와 경북 최초의 장학재단인 향산장학회를 설립하고, 1982년 포항 중앙고와 중앙여고를 설립했다. 이처럼 각종 활동을 하던 도중 그는 1979년 친구였던 김재환 영일군수에게 '육지만 개발하지 말고 바다를 신경 써라. 앞으로 우리 고향이 나아갈 길은 바다가 될 것'이라는 야무진 충고를 들었다.
김 대표는 곧바로 광어 양식사업에 뛰어들었지만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장학회 등 벌여놓은 일이 너무 많아 신경을 못쓴 탓이다. 광어양식을 과감히 포기하고 2010년, 당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전복 해상 양식을 시작했다. 당연히 주위 사람들은 그의 무모한 도전에 혀를 차기 일쑤였다.
"어느 날 서해안에 가보니 뿌연 바닷물에 전복을 양식하고 있더군요. 왜 동해안의 청정해역에서는 키우지 못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동해안은 연중 수온이 전복 양식에 더 적합하고 먹잇감인 다시마와 미역도 충분한데 말이죠."
처음에는 서해안의 방식을 그대로 동해안에 적용하려다 여러 차례 실패를 겪었다. 2013년 동해안을 휩쓴 적조에 70만 마리의 전복이 폐사하는 등 큰 좌절을 겪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더 튼튼한 양식기법을 개발하자며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결국 올해 그는 구조물 안에 전복을 키우는 '축제식 양식'이라는 독자 기법을 개발했다. 김 대표의 결실은 4월 말 150만 마리의 전복으로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아울러 전복의 배설물을 먹잇감으로 해삼을 양식하는 새로운 도전도 계획 중이다.
"동해안 청정해역에서 자란 어류들을 포항의 새 브랜드를 성장시키고 싶어요. 비록 나이가 많긴 했지만, 고향 발전을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포항 신동우 기자 sdw@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