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승강장 갤러리'…버스 기다리는데 문득 다가온 여유

관리 위탁업체 운영 최영범 씨 '명화 전시' 눈길

30일 대구 중구의 한 버스승강장 광고판에 일반 광고물 대신 독일 출신 조각가 헤르베르트 멜러의 미술 작품이 전시돼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30일 대구 중구의 한 버스승강장 광고판에 일반 광고물 대신 독일 출신 조각가 헤르베르트 멜러의 미술 작품이 전시돼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어, 이건 뭐지? 광고는 아닌 거 같은데…."

대구시내 일부 버스 승강장에 설치된 명화들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이들 그림은 승강장 대형 광고판에 전시돼 시민들이 광고로 생각하고 살펴보지만, 광고임을 나타내는 글귀나 로고를 찾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길을 돌리기 일쑤다.

그런데 이들 그림은 광고가 아닌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화 카피본이다. 대구국제공항, 동성로, 경북대 등 승객들이 붐비는 버스 승강장 한쪽 면에는 독일 출신 헤르베르트 멜러의 'asclepia', 최병소의 'Untitled paper', 신광호의 '[235] untitled' 등의 작품이 설치돼 있다. 오후 6시 이후 조명이 켜지면 버스 승강장은 더욱 빛을 발하는데, 순식간에 고급 갤러리로 변한다.

이를 설치한 사람은 수성구 대구스타디움 근처에서 개인 갤러리를 운영하는 최영범 대표다.

그는 2013년부터 대구시의 유개 승강장(버스 승강장 중 지붕이 있는 곳)을 관리하는 위탁 업체를 운영하게 되면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지나가는 시민들이 미술 작품을 보며 조금이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 명화를 전시하게 됐다.

갤러리 운영을 위해 스페인, 독일 등 많은 국가를 다녔고 그 지역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현지 버스 승강장에 전시돼 시민들이 예술을 일상에서 즐기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 승강장 관리 사업을 병행하게 되면서 적용하게 됐다는 것.

그는 "수익을 내야 하는 사업체 대표로서, 또 직원들 입장에서도 이는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다"며 "버스 승강장은 시민들의 공간이자 대구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공간인 만큼 회사 운영에 들어가는 최소한의 비용만 광고 수익으로 벌어들이고 나머지는 시민들에게 돌려주자는 의견에 직원 모두 동의해줬다"고 했다.

사실 '승강장 갤러리'를 운영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들 작품을 설치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만 승강장 한 곳당 40여만원. 색감을 원작과 최대한 비슷하게 나타내기 위해 실크 재질에 작품을 인쇄하고, 일반 플래카드 인쇄물보다 10배 이상 비용이 들어가는데다 직원이 일일이 차를 타고 다니며 설치해야 한다. 전체 유개 승강장 1천160개 중 승객이 많이 이용하는 37곳에 작품을 전시한 것을 감안하면 설치 비용만 월 1천만원이 훌쩍 넘는다.

이 정도는 애교다.

작품 전시를 위해 버스 승강장 광고를 포기한 것까지 감안하면 손해가 월 7천만원으로 늘어난다. 작품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이들 승강장 한 곳당 150만원 이상을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 승객이 많은 승강장의 광고 단가는 일반 승강장보다 3배 이상 높다. 얼핏 계산해도 '승강장 갤러리' 운영을 위해 연간 8억원 이상의 손해를 감수하는 셈이다.

최영범 대표는 "다른 지역에서 온 지인들로부터 승강장에 전시된 작품에 대해 '대구의 첫인상이 세련됐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보람을 느낀다"며 "최근에는 버스 승강장 전시를 조건으로 갤러리 전시회를 문의하는 작가도 있어 아주 뿌듯했다"고 했다.

허현정 기자 hhj224@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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