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러브레터/강혜선 지음/북멘토 펴냄
옛 사람들은 편지를 '마음속 정회(情懷)를 털어놓아 만남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여겨 편지쓰기를 즐겼다. 까닭에 그들은 편지를 보낼 때 대개 두 벌을 썼다. 하나는 상대에게 보내기 위해, 또 하나는 자신이 간직하여 편지를 쓸 때 정회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가 하면 서간체의 산문 대신 서정시로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 책은 몇 구절의 한시로 산문 편지가 넘보기 어려운 정경을 펼쳐놓은 편지 시 49편을 뽑아 전문을 싣고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근래엔 술마저 말라버려/ 온 집안이 가뭄이 든 것 같았네/ 고맙네, 그대 좋은 술을 보내주니/ 때맞춰 내리는 비처럼 상쾌하네.'
고려 후기 시인 이규보(1168~1241)가 지은 '술을 보내준 벗에게 사례하다'라는 작품이다. 술이 떨어진 집을 가뭄이 든 것이라고 하고, 친구가 보내 준 술을 때맞춰 내리는 호우라고 추어올리고 있다. 그가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지, 친구가 보내 준 술을 얼마나 고맙게 마셨는지 잘 드러나 있다.
조선시대 전라북도 부안 기생 매창(1573~1610)은 연인이었던 시인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편지를 썼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흰 배꽃이 비처럼 날리던 봄날 울며 헤어진 임, 그 임도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보며 여전히 날 그리워하는지. 만날 수 없는 처지라 오직 꿈길에만 찾아갈 뿐이라고 노래한 것이다. 이화우와 추풍낙엽을 대비함으로써 문학적으로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고려 말 문인 이숭인(1347~1392)은 조선 개국에 동참하지 않았다가 유배되었다 장살됐다. 그의 벗 권근은 조선 건국공신으로 조선 초기 문물제도 정비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함께 지냈지만 격동기에 뜻을 달리해 한 사람은 정권 깊숙한 곳에, 한 사람은 유배지에 살았던 것이다. 물러난 이숭인이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는 벗 권근에게 편지를 썼다.
'한 줄기 시내는 맑고 사방 산은 깊으니/ 세상 밖의 마음이라 한낮에도 그윽하구나/ 서울이라 벗님네 편안히 지내시는가/ 인편을 만나거든 소식이나 전해주오.'
이에 속세에서 벼슬살이하는 권근 역시 시로 답했다.
'문밖에는 누런 먼지 깊이가 만 길이라/ 서울에 봄이 오니 나 홀로 마음 상하네/ 알겠구나, 그대의 한낮 그윽한 맛/ 이곳 속세를 향해서 이야기를 말아 주오.'
누런 먼지가 만 길이나 뒤덮인 서울이라 봄이 와도 봄을 진정 누릴 길이 없다고 속내를 밝히고 있다.
조선 중기 문관 권필(1569~1612)은 벗 구용을 양주 산속에 묻고 돌아오면서 시를 썼다.
'이승과 저승이 아득해 만날 길 없더니/ 한바탕 꿈이 은근해도 진짜는 아니겠지/ 눈물 닦으며 산을 나서 갈 길을 찾으니/ 새벽 꾀꼬리 울며 홀로 가는 사람 보내네.'
이승과 저승으로 길이 갈라진 벗을 땅에 묻은 날 밤, 꿈속에 나타난 벗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그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 다음 날 새벽 산을 나섰는데 어디선가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을 전송하는 벗의 넋인 듯싶다는 의미다.
이 작품은 조선 중기 문인 이정구가 권필을 제술관으로 천거할 때 권필의 작품이라며 선조 임금에게 들려주었던 시로 유명하다. 선조 임금은 권필의 시를 듣고 "석주(권필의 호)와 구(구용)의 사귐이 얼마나 깊으면 시어가 이처럼 슬픈가"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돼 있으며, 시작품과 해설, 당시 시대적 분위기, 편지 시를 쓴 인물 이야기 등을 곁들이고 있다. 지은이 강혜선은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235쪽, 1만4천원.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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