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른 아침에] 선물은 신도 무릎 꿇게 한다지만

고려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 박사. 한국개발연구원 정책홍보실장. 방송통신위원회 특별심의위원
고려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 박사. 한국개발연구원 정책홍보실장. 방송통신위원회 특별심의위원

지인 선물 받은 상원의원 재판 회부 뉴스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 농기구 창고에

먼지 뒤집어쓴 국보급 그림들 떠올라

선물 안긴 한국 정·재계 인사 측은해져

유학시절 전직 주한 미국대사의 저택으로 초대받은 경험이 있다. 주인공은 이제 고인이 된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였다. 그가 초대한 집은 미 동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시 중심부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컨트리풍 저택이었다. 개인 소유의 푸른 호수가 있고 뒷마당이 널찍했던 품격 높은 집으로 기억된다. 당시 필자와 함께 초대받은 인사는 전직 장관을 비롯해 한때 한국을 주름잡던 거물들이었다.

그날 나는 워커 박사의 안내로 저택을 골고루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서재에는 한국의 지인들부터 온 많은 편지, 기념품들이 눈에 띄었다. 이 다정다감한 노인은 그런 편지들을 내보이며 자신과 한국의 실력자들과의 관계를 에둘러 자랑했다. 그러면서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한국말로, 숨겨진 외교 비사와 함께 서울에서의 좋았던 순간들을 그리워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낸 덕분에 중국어에 능통했다. 예일대 박사인 그는 이런 이유로 2차 대전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서 통역을 맡는 등 중국 전문가로 활동하기도 한다.

그의 재임기간인 1981년 8월부터 86년 11월은 암울했던 5공화국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서 민주화가 움트던 시기였다. 그는 자서전 '한국의 추억'에서 "김대중 씨 감형을 조건으로 전두환, 레이건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고 밝혀 주목받기도 했다. 외교관이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에 가서 거짓말을 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라는 말이 있을진대 그의 말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생생히 지켜본 그였지만 나에게는 그저 아담한 체구의 노교수로 기억된다. 그 뒤 그가 서명해 서울로 보내온 그의 자서전은 지금도 내 서재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날 정작 내가 놀란 것은 그가 털어놓은 외교 비사가 아니라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선물 때문이었다. 거실은 한국의 지인들이 보낸 그림, 골동품, 도자기, 병풍 등등으로 가득해 하나의 거대한 선물 집합소를 연상케 했다. 아마 돈으로 친다면 엄청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낫, 삽 등 온갖 잡동사니들을 보관하고 있는 농기구 창고에 들러 더욱 놀라게 된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한국 최고 화가의 그림들이 벽면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모두가 민망한 듯 얼굴을 돌렸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오랜 친구인 안과의사에게서 선물을 받은 미 민주당 로버트 메넨데스(61'뉴저지) 상원의원이 뇌물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고 보도했다. 지한파인 메넨데스 의원은 "검사는 우정과 부패의 차이를 모른다"고 우정의 선물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론적으로는 유죄가 확정될 경우 뇌물 혐의 8건으로 무려 120년의 징역이 가능하다는 게 NYT의 4월 3일 자 보도다. 이에 앞서 워싱턴 포스트는 2013년 8월 조셉 F. 필 전 주한 미 8군사령관이 한국 근무 당시 '부적절한 선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중장에서 강등된 소장으로 전역되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필 전 사령관은 한국인 친구로부터 1천500달러 상당의 몽블랑 펜, 2천달러 상당의 가죽가방 등등을 선물로 받았다. 오랜 기간 알고 있었던 친구의 우정의 선물이라고 주장했으나 미 국방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이번 뉴스를 접하며 느닷없이 워커 대사 농기구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국보급 그림들이 떠올랐다. 엄청난 가치도 모르고 창고에 처박아 둔 고 워커 대사를 탓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나 그 많은 선물을 앞다투어 안긴 한국의 정'재계 실력자들이 갑자기 한없이 측은해진다. 그리고 그 많은 귀한 그림들이 미국 대륙 어느 누구의 집에 걸려 있을지 갑자기 무척 궁금해진다.

김동률/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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