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기득권 포기 운동

고등학교 수업시간 때 괜히 아는 체했다가 혼자 뜨끔했던 적이 있다. 선생님이 산업발달 5단계를 설명하면서 마지막인 5단계에 상향(尙饗)이라는 낱말을 쓰고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별생각 없이 '끝'이라는 뜻인 듯하다고 답했더니 이유를 되물었다. 제사지낼 때 축문의 끝 낱말이라고 하자 선생님은 "맞기는 한데, 너희 집은 가정의례준칙을 지키지 않는구나"라며 웃었다. '가정의례준칙'이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제사지낼 때 단속이라도 나오면 큰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신독재시절, 나라를 바꿔보자는 운동이 많았다. 새마을운동을 필두로 자연보호, 산림녹화 등 웬만한 것에는 다 운동이라는 말을 붙였다. 혼식장려운동, 쥐잡기운동 같은 것도 있어, 매일 도시락을 검사하고, 쥐약이나 쥐덫을 사야 한다고 집에 가서 조르기도 했다. 정부가 강제하고 단속까지 벌였다는 점에서 '독재시절 답다'고 할 이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국민계몽에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한다.

이런 유의 하나가 1973년, 대통령령으로 가정의례준칙까지 마련해 벌였던 허례허식 퇴치운동이다. 복잡한 관혼상제 등을 간단하게 줄여 낭비를 막자는 것으로 적발되면 처벌도 했다. 약혼식을 못하고, 청첩장 돌리는 것도 금지됐다. 제사 때 축문을 못 쓰게 하고 할아버지까지 2대 조(祖) 제사로 제한했다. 장례가 3일장으로 줄거나, 양력인 1월 1일을 설날로 못박아 '구정'(舊正)을 못 쇠게 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런 시대였으니'상향을 축문에서 봤다'고 답한 것을 후회한 것은 당연했다.

이제 허례허식 퇴치운동은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형편이 나아지면서 허례허식은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자'의 필수적인 오락거리가 됐다. 여기에다 조금밖에 가지지 못한 이들은 이를 따라가려고 안간힘이고, 없는 이들도 합세하는 형편이다. 자기만족과 함께, 부와 권력을 과시하고 남이 알아주기 바라는 허장성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껏 뽐내도 '그러려니'하고 넘어갈 자치단체장이 참여행사를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또 내빈석을 없애고 행사절차도 대폭 줄인다고 한다. 포항시와 영천시의 이야기다. 시장이 온갖 행사에 얼굴을 내밀다 보니 정작 일할 시간이 모자란다는 것이 이유다.

말은 쉽지만, 얼굴을 많이 알려야 하는 선출직 시장이 무게 잡을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기란 정말 어렵다. 하지만 이런 행사는 자치단체장만 기득권을 포기하면 일사천리다. 단체장이 나서지 않는데 의회 의장이나 지역구 국회의원이 나설 명분이 없다. 주민과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지역 유지를 등장시키지 않아도 된다. 너도나도 인사말을 하고, 줄줄이 내빈 소개를 하다 보니 행사는 어디 가고 의전 치레만 남는다. 공무원 사이에서 '아무리 좋은 행사라도 의전에 실패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논어의 첫 머리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로 시작한다. 학문과 벗의 즐거움, 군자의 마음가짐을 말한 것이다. 스스로 국보라고 일컬은 고 양주동 박사가 유교 최고 경전의 첫 머리치고는 너무 평범해 놀랐다고 했다가 세월이 흘러 그 평범함이 진리라고 감탄했다는 바로 그 문장이다.

앞의 두 구절도 그렇지만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면 어찌 군자라고 하지 않겠느냐'는 마지막 구절은 곱씹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고 자치단체장에게 군자가 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 열심히 하면 행사 곳곳에 다 안가도 유권자가 먼저 아니까 몰라준다고 걱정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참에 이런 분위기를 포항 영천뿐 아니라 대구'경북과 우리나라 전체로 확산시키는 '기득권 포기 운동'이라도 벌여 좋은 관행으로 정착시켜도 좋을 듯하다. 이강덕 포항시장과 김영석 영천시장의 결단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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