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바닥에 고인 바다,
그때의 어리디어린 바다는 밤이었다.
새끼 무수리가 처음의 깃을 치고 있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동안
바다는 많이 자라서
허리까지 가슴까지 내 살을 적시고
내 살에 테 굵은 얼룩을 지우곤 하였다.
바다에 젖은
바다의 새하얀 모래톱을 달릴 때
즐겁고도 슬픈 빛나는 노래를
나는 혼자서만 부르고 있었다.
여름이 다한 어느 날이던가 나는
커다란 해바라기 한 송이
다 자란 바다의 가장 살찐 곳에 떨어져
점점점 바다를 덮는 것을 보았다.
(전문. 『처용단장』. 미학사. 1991)
말년의 김춘수는 "그럭저럭 내 시에는 아무것도 다 없어지고/ 말의 날개짓만 남게 됐다./ 왠지 시원하고 왠지 서운하다" (「말의 날개짓」『거울 속의 천사』 2001)고 했다. 그 스스로 말했듯이 '사상과 역사를 믿지 않는' 그의 '무의미 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의미 이전의 원점에서 보려는 노력'으로서의 시다. 그의 기획은, 바디우가 설명하듯이, 헤겔의 근대 이 후 정치와 과학에 자리를 내준 철학의 자리를 대신하던 시의 시대의 이념에 이어져 있다. 시의 이념은 모든 앎에 구멍을 내고 앎을 말소시키는 것, 혹은 시는 말라르메의 이야기처럼 주체로서의 작가가 부재할 때 나타난다고 한 그 역사적 지점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김춘수의 시를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다만 그가 스스로 평가하듯이 그의 시는 말의 날개짓으로만 남지 않았고 (혹은 더 큰 날개짓으로 남았고) 그의 무의미의 궤적은 이제 의미의 궤적이 되어 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그 독해를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떤 한 이미지가 무엇을 비유하는 것인가 묻기 때문이다. 모든 이미지가 그 무엇인가를 비유하는 것은 아니다. 손바닥-어린 바다-무수리 새-자라는 바다-새하얀 모래톱-달리는 나-해바라기-살찐 바다. 김춘수의 이 이미지들은 독해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서에 구멍을 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다. 나는 살찐 바다를 덮는 해바라기 한 송이에, 가장 취약했다!
시인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