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화장

임권택 감독+안성기 주연+김훈 원작 '삶의 성찰'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작품, 2004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김훈 작가 원작, 내면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안성기 주연. 국민 감독, 국민 작가, 국민 배우의 삼박자가 어우러진 작품이니 기대할 수밖에 없다. 김훈 작가의 원작이 영화화된 것은 처음이고, 작품 수가 세 자리인 감독도 한국에서는 처음이며, 한국의 대표 중년배우가 간만에 나서는 주연작이다. 거기에다 김호정, 김규리의 파격 연기까지 있어 영화에 거는 기대감이 남다르다. 본 영화가 상영되기 전, 임권택과 안성기가 협업했던 영화 클립들이 차례로 전개되는 트레일러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가슴을 뭉클하게 하며, 걸작이 아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화 표면상의 스토리는 흥미롭다. 암 투병 중이던 아내(김호정)의 임종을 맞은 화장품회사 마케팅팀 중역인 오 상무(안성기)는 죽어가는 아내를 간호하는 동안, 회사에 새로 들어온 홍보팀 대리 추은주(김규리)에게 마음을 뺏기는 자신을 발견하고 고뇌한다. 젊은 여성과 죽어가는 아내 사이에서 흔들리는 중년남성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그러나 영화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영화가 아니다. 실은 별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적 장치는 모두 오 상무 마음속의 갈등이라는 감정의 결을 표현하는 데 할애된다.

죽음을 다뤘던 임권택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축제'(1996)가 왁자지껄한 장례식 풍경을 통해 죽음은 또 하나의 삶의 모습이며, 새로운 세대의 시작임을 보여주었던 것과 대비된다. '화장'은 고요하고 내면적이며 성찰적이고 진중하다. 영화는 아내의 병마와 죽음을 둘러싼 오 상무의 일상이 어떻게 지속하는지, 그 안에서 어떤 변화를 갈구하는지, 그리고 삶은 무엇인지 탐구하려고 애쓴다.

'화장'은 몸을 치장하는 화장(化粧)이자, 시신을 불태우는 화장(火葬)의 이중적 의미로 쓰인다. 같은 발음이지만 정반대의 의미, 즉 젊어 보이고자 하는 적극적 태도와 완전한 죽음을 향한 통과의례를 각기 뜻한다. 영화는 삶에서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육체적 젊음과 죽음에 마주하는 한 남자의 심리를 탐구하는 여정이다. 장소는 한정적이다. 병원, 회사, 장례식장을 오가며 현재와 과거가 섞이고, 실제 사건과 오 상무의 내면 여정이 뒤섞인다.

그는 한 아름다운 여자에 매혹된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이미지일 뿐이다. 실은 자신의 잃어가는 젊음, 노화되어가는 몸, 열정에 대한 상실감 등이 영화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작업은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영화작업을 해왔던 임권택 감독으로서는 새로운 실험이다. 올해로 80대에 접어든 노(老)감독, 칸영화제 외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세계적인 영화인들의 존경을 받는 대(大)감독, 비평계에서 인정받을 뿐 아니라 흥행 영화도 매우 많은 영화 장인(匠人)인 그가 새로운 영화 세계를 펼쳐보이다니. 그는 아직 젊다. 그래서 더욱 존경스럽다.

화려한 비주얼과 자극적인 사운드의 향연 속에서 극단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영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다른 영화보기 방식의 이 영화는 심심하거나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두 용감한 여배우의 과감한 표현이 자극적인 홍보거리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불륜 드라마가 아니라 잃어버린 것,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담은 영화이다. 또한 세상사 이치대로 먼지처럼 흩어져버리고 마는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일상을 지속해야 한다고 용기를 주는 영화이다.

잘 늙어가는 일, 죽음과 삶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한국 영화계의 어른이자 인생의 대선배로서 임권택 감독은 미니멀리즘 스타일로 단순하지만 거대한 발언을 하고 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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