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에 신예술의 시대(Ars Nova)라는 시기가 있었다. 유럽 음악계의 1300년대를 이르는 용어인데, 일반적으로 '세속음악의 양성화 시대'라 부른다. 교권에 억눌려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이 제한받던 시기가 수명을 다할 즈음인 1309년부터 1377년까지이다. 당시 로마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져 머무른 이른바 '아비뇽유수'라는 교황청 굴욕 사건 이후 교회 권력은 급속도로 약화됐고, 세속적 문화 예술의 활성화라는 긍정적인 변화가 유럽 전역에서 대단한 이슈가 됐다. 이 사건 이후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간에 영토분쟁인 '백년전쟁'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때 영국 음악계에는 '반대륙 정서'라 할 수 있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됐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유행하던 여러 초기 대위법적 음악 기법의 사용을 피해 단성음악을 추구했다. 또 당시 기본 음 체계였던 선법이라는 음계를 피해 장조 단조의 음악을 즐겼다. 서구 음악사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인 '포부르동'이란 기법을 통해 화음의 체계도 달리했다.
백년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이 영국 음악은 영국의 민족양식을 형성하며 유럽 각국의 민족양식 형성의 촉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후 이어진 장미전쟁으로 유럽 내 영국 음악의 역할이 둔화되기는 하였지만, 이 역사적인 현상은 위기를 정체성 정립의 기회로 바꾼 영국 음악사의 중요한 결실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우리의 '인삼'이 '진생'이란 일본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졌듯이 '포부르동'(fauxbou rdon)이란 명칭도 원래 영어로 '파버든'(farbud en)이었지만 유럽 전역에 전파될 때는 '포부르동'으로 알려졌다. 영국이 그 당시 프랑스에 비해 문화 후진국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는 물 흐르듯 순리를 따라 흐른다. 14세기 신예술시대처럼 사회의 변화가 예술의 발전에 좋은 영향을 주는 시기도 있지만, 정치'경제'문화를 통째로 변화시켜 놓는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원치 않는 사회 변화의 시기도 있다. 어떤 원하지 않는 상황이 우리 사회를 쓸고 지나가더라도 그 속에서 영국과 같은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영도력만큼 예술가들의 창의성과 의지, 지혜가 빛을 발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안정적이지 못하다.
특히 예술계는 정책의 변화에 따라 목표를 잃고 표류한다. 당시의 영국 작곡가들이 어떤 특별한 성과를 목적으로 정체성 확립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위기의 시간에 영국 음악의 본질을 돌아보는 의지와 지혜를 가졌던 것처럼 지금 우리도 예술가들이 표리부동하지 않고 이상적 비전을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세워가야 할 시기이다. 바로 지금이 문화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징검다리를 놓아야 할 시기가 아닐까.
이철우(작곡가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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