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배한성의 새論새評] 꽃의 계절 4월과 詩

방 없다던 유럽 호텔, 시 읊으니 방 내줘

고은 선생, 괴테가 예약 취소한 곳서 숙박

시를 외워 들려주는 능력의 영향력 실감

화창한 봄날 시 몇편 암송할 여유 필요

4월은 화월(花月)이다. 꽃이 저리 흐드러지게 피었고, 또 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보통사람들도 화가나, 시인의 마음이 되고픈 요때 고은 선생님을 만났으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가나아트센터 스터디에서 선생님을 초대했다. 어떤 꽃을 좋아하시는지 궁금하다고 했더니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실망(?)스러운 대답을 한 까닭이 있었다. 시인의 어린 시절 헐벗음은 사람들만의 처지가 아니었다. 산의 나무들은 땔감으로 몽땅 베어져 헐벗었고 들판의 풀은 물론, 꽃들마저 뽑혀 불쏘시개로 버려졌기에 꽃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거였다.

꽃의 역사와 의미를 해석하는 것도 그랬다. 6만 년 전 이란의 무덤을 헤쳐봤더니 소년의 유골 이마 부위에 꽃이 놓여 있었다. 히아신스였다. 충청도에서도 4만 년 전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아기 미라의 이마 위에 있는 것은 국화꽃이었다. 동서양 없이 사후 세상에서 꽃처럼 예쁘게 다시 피어나라는 염원이 시의 기원 같은 의미라고 하셨다.

그 전주엔 서울대 강성진 교수의 강의 중 고 최인호 선생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유럽 여행 중 그곳에 있는 친형과 예약 없이 작은 호텔에 가서 방을 부탁했더니 없다고 하더란다. 동양의 게이들처럼 보는 것 같기도 해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서며 최 선생이 독일어로 시를 읊었더니 호텔 직원이 잠깐만요 하더라나. 물론 두 형제는 전망 좋은 방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그 얘기를 고 선생께 말씀드렸더니 이런 사연을 들려주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어느 호텔에 갔을 때였다. 아시아의 큰 시인이라고 소개하자 넓은 방을 줘서 혼자 잠자기 무서웠다나. 다음날 호텔 매니저가 사인을 부탁하면서 잠깐 안내할 곳이 있다며 어느 룸으로 모시고 갔다. 벽면에 무슨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괴테 선생께서 예약을 하셨다가 그만 다른 일정이 있어 취소한 객실입니다"라는 내용이더라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인물은 방 예약을 취소했다는 것도 역사요, 전설이 되었다.

고 선생께서도 "나 고은 이곳에서 곱게 자고 갑니다"라고 써주었다니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 우리의 대시인 역시 역사와 전설이 되실 거다.

얼마 전 모네상스 강신장 대표와 점심을 하면서 고 선생 뵌 얘기를 했더니 시를 300편 넘게 외우는 정영구 씨를 소개해 주었다. 100여 편의 시를 보지 않고 낭송하는 시 낭송가 김서연 씨에게도 놀랐는데 300여 편이라니? 시를 외워서 들려주는 능력은 의외의 사람들과 장소에서 묘한 영향력으로도 작용한다는 사실을 최인호 선생의 일화로 느낄 수 있었다.

정영구 씨가 일식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무소불위의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 최측근 장성 16명이 그곳에서 회식을 했다. 번쩍거리는 별만도 40여 개가 넘는 장성들이 흥이 오르자 사장에게 노래를 강요했다.

그는 멀쩡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노래는 부를 줄 모릅니다만 시는 몇 편 알고 있습니다. 특히 모두 장군님들이시니 맥아더 장군께서 매일 암송했다는 시를 낭송하겠습니다."

청춘 (Youth)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중략)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중략)

이 시를 썼을 때 시인의 나이는 78세, 인천상륙 작전 때 맥아더 장군의 나이는 71세, 여러분은 청춘이시다. 라는 맺음말에 박수와 환호가 없었겠는가.

하긴 노태우 씨도 대통령 후보 시절 관훈클럽 토론회에 참석했을 때 외우고 있는 시가 있느냐고 하자 바로 낭송을 했다. 군 생활의 딱딱함으로 친근한 이미지는 아니었는데 의외라는 평이 있었다. 시인이나 시 낭송의 대가들처럼 몇백 편의 시를 외우는 것은 어림도 없지만 몇 편쯤은 암송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뭐든 실천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알뜰한 그 맹세도 봄날처럼 가버릴지도 모를 테니까 말이다.

성우 서울예술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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