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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노처녀 춘추전국시대

▲지 안
▲지 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밑 빠진 단칸방에 월세를 꾸역꾸역 메워 넣으면서도 보물 1호인 미니카를 포기하지 못하는, 단언컨대 나는 이 시대의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결혼을 도피처로 삼기에는 어느새 황금 같은 정년기의 시간이 돌덩이처럼 굳어져, 때늦은 올드미스의 타이틀을 가슴팍에 훈장처럼 새기고, 라면을 안주 삼아 별다방 커피를 홀짝홀짝 들이켜며 배고픈 주머니로 영혼을 달래야 하는, 서글픈 30대 노처녀인 나에게도 명절증후군은 피할 수 없는 난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외로움으로 퇴색된 자유라는 명맥 아래 가족들의 성화로 때늦은 결혼을 결심하기에는, 치솟는 분유값과 기저귀값에 허덕이며 출산장려금으로도 위로받지 못하고 육아전쟁에 시달리는 친구의 얼굴이 노처녀의 볼멘소리를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싱글에 깨알처럼 박힌 열정이라는 이름은 이따금씩 거대한 자본주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뉴턴이 한입 베어 먹음직한 사과 브랜드의 휴대전화기를 사용한다고 해서 애국심을 잃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령화시대에 출산만이 애국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스티브 잡스 형님께서 말하셨듯, 어쩌면 이 시대의 노처녀들은 단지 내면의 목소리와 마음의 직관을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 싱글의 싱그러움을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백세시대를 앞둔 시점에 혹시 아는가? 통일이 되어 '남녀북남'의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지.

꿈을 외치던 지난 2002년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에서 더 나아가 청춘을 부르짖어도 모자라지만 허기진 공허함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환상은, 생이 아닌 어쩌면 죽음의 위협에서 허덕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실의 짐이 되어 그저 무거울 따름이다. 더군다나 결혼이라는 평생의 약속이자 일생일대의 큰 행사를 도피처나 일말의 경험으로 삼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파릇파릇한 시기에 그저 늦어지는 세월을 붙잡지 못해 이제는 흘러간 정년기로 이름 붙여진 노처녀들에게, 희망의 얼굴이 감춰진 미래란 어쩐지 불안하고 위태롭기 그지없다.

이는 속박되지 않은 자유 속에서도 족쇄처럼 얽매이는 노처녀라는 타이틀에 대한 실낱같은 핑계일지는 모르나, 저출산 국가정책에 힘입지 못하고 출산을 기피하는 청년층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날이 오면 내 아이를 안심하고 유치원에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더불어, 춘추전국시대를 아우르는 올드미스들에게 말하고 싶다. 영혼의 한 조각 단맛을 위해 그 옛날 서태지는 노래하지 않았던가? "우린 아직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이 담백한 한마디에 오늘도 전국의 노처녀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가 손을 맞잡고 거니는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을 노래하는 그날이 오기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뮤지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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