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혜영의 근재문학을 읽다] 어제의 바람이 오늘 부는 도시 경주, 그리고 '무녀도'

경주를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는 기묘한 느낌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계림의 숲과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분들 사이를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는 경계가 허물어져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할 때가 있다. 경주는 그런 곳이다. 천 년의 역사가 여전히 도시 곳곳에 숨 쉬고 있어서,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의 길 찾기 앱보다는 별을 보고 길을 찾아가는 것이 훨씬 익숙하게 느껴지는 곳이 경주다. 그곳에서는 처용 신화의 주술성이 과학의 힘을 앞지르고, 삶과 죽음,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섭리로 움직이는 향가의 의식이 서구 중심의 합리적 세계관을 앞지른다.

식민지 시기의 조선에서 '경주'는 이질적 공간이었다. '문명개화'의 거대한 바람 속에서, 식민지 조선 전체가 개발과 발전을 향해 달려갈 때에도 경주는 여전히 '처용'의 신화와 '향가'의 의식과 더불어 있었다. 이러한 경주의 독특한 의식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작가가 김동리(1913~1995)이다. 김동리는 대구의 전통적 기독교 계통 학교인 계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의식은 언제나 '어제의 바람이 오늘 불고, 저승이 이승을 이기는 곳' 경주에 머물러 있었다. '무녀도'(1936)는 경주와 김동리의 절묘한 화합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무녀도의 세계는 어둡고 암울하지만 신비롭다. 기독교도가 된 아들이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다른 남매간의 근친상간이 자행되고, 마침내 무녀인 어미가 아들을 칼로 찔러 죽이는 비극이 발생한다. 기독교도가 금기된 욕망 속으로 말려들고, 무녀 어미의 굿 덕분에 말 못하는 딸이 입을 열게 되는 등 관능적이며 신비로운 무녀도의 세계는 당시 조선을 덮치고 있던 문명개화의 드센 바람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성'(性)에 열려 있고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간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그 신비롭고도 비합리적인 경험은 '어제의 바람이 오늘 불고, 저승이 이승을 이기는' 경주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김동리는 무녀도를 통해서 전통적인 조선의 또 다른 면모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 전통적인 조선이란, 당대 지식인들, 그리고 조선에 앞서 서구적 근대를 수용한 일본에 의해서 '미신'으로 가득 찬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매도당해온 세계이기도 했다. 이에 반해 김동리가 바라본 전통적 조선은 참으로 인간적인 세계이다. 그 세계에서 인간은 욕망에 쉽게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이며, 자연은 단순한 개발의 대상을 넘어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의 불완전함이 용인되면서, 자연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대의 바람은 새로운 근대를 향해서 불고 있었고 김동리 혼자로는 그 바람에 맞서기가 어려웠다. 무녀 '모화'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무녀도처럼 조선의 전통적 세계는 그렇게 덧없이 소멸되어 갔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근대적 세계로 갑작스럽게 내몰리면서 전통과 새로운 근대 간의 균형 감각을 상실했던 조선이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정혜영 일본 게이오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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