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랑한다고 말을 못했던, 첫사랑 풋풋했던 그때…『힐링 시네마 다이어리』

힐링 시네마 다이어리/ 양진오 지음/ 열린 길 펴냄

'힐링'이 대세다. 책, 영화, 연극, 음악, 무용, 그림, 토크쇼 할 것 없이 '힐링'이다. 험한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그들의 상처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주고, 그들의 상처를 부드럽게 감싸줌으로써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벗어나 햇빛 쏟아지는 거리로 불러내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요즘 유행하는 '힐링'과 달리 이 책은 '누가 위로해 주는 게 힐링이 아니다. 그건 회피거나 도피다. 언제부터인가 익숙한 개념으로 등장한 힐링, 위로니 격려니 그럴듯한 수사학이 힐링의 핵심처럼 선전되거나 알려졌다. 힐링은 위로와 격려의 개념이 아니다'고 말한다.

'힐링은 타자가 나에게 주는 치유의 선물이 아니다. 힐링은 황망한 오늘을 나의 오늘로 재구성하며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주체 구성의 축제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결별해야 한다. 아주 과감히. 그리고 미래의 나는 오늘의 나와 결별해야 한다. 더 과감히 말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내가 계속 탄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은 8개 영화 작품을 통해 상처받은 사람들과 그들이 상처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 속 주인공들을 위로하거나 그들에게 상처를 준 사회와 사람을 원망함으로써 '네 잘못이 아니란다.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란다'고 말하지 않는다.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지도 않는다. 대신 지은이는 영화 주인공들의 상처, 그러나 관객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상처의 진면목을 사려 깊은 눈으로 생생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행동과 언어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며,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영화의 주인공들은 치욕스러운 과거이지만 그 과거를 인정하면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갔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가공할 폭력과 모멸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야 할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면서 낡은 나와 결별했다'고 말한다.

영화 '시간의 숲'을 통해 책은 '부조리와 세계와 마주 서야 할 자는 어쨌든 본인이다. 이 마주함의 용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피하고 싶을 때가 더 많다. 마주하자면 나를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나의 몸과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가벼워져야 마음의 기억을 재구성할 수 있다. 힐링의 근본은 기억의 재구성이다. 슬프고 아프고 힘든 기억을 뒤로 돌리고 기쁘고 건강하고 즐거운 기억을 전면에 배치하는 것이 힐링의 근본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려면 '익숙한 시간과 장소로부터 잠시라도 결별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주도 올레길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은 낯선 장소에서 기억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다'고 덧붙인다.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승민과 서연은 처음으로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했다. 외딴 시골 버스정류장. 서연은 승민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승민은 죽을 용기를 내 잠든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그러나 서연은 금방 눈을 뜨면서 "나 오줌 마려"라고 말한다. 승민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잠든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은근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황당하게도 "나 오줌 마려"였다.

입맞춤으로 "난 널 사랑해"라고 고백했는데, 그녀는 "나도 널 사랑해"라고 말하는 대신 "나 오줌 마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승민에게 혼란을 안겨준 서연의 이 말은 서연 역시 사랑에 서툰 사람이며, 승민을 사랑한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승민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풋풋했기에 대놓고 고백하지 못했고,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지은이는 '성인이 되어 만난 두 사람은 서로 첫사랑이었음을 확인하지만, 각자의 길을 그대로 가는 것, 그것은 비록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완전한 지속'이라고 말한다. 상처처럼 보이는 사랑, 중간에 끝나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랑이야말로 오래도록 지속되는 사랑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들 영화를 비롯해 책은 '혜화, 동' '남쪽으로 튀어' '애자' '고령화 가족' '로니를 찾아서' '반두비' 등을 이야기하며 사람과 사회와 삶에 대해 흥미롭고도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은이 양진오 교수는 서강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163쪽, 1만3천원.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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