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태맹의 시와함께] 결빙(結氷)의 문장을 읽는다-최하림(1939~2010)

결빙(結氷)의 문장을 읽는다 어느 시인이 북극에서 포획해 가지고 왔다는 극도로 단단하고 투명하기도 한, 이물질과도 같은. 나는 결빙(結氷)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싸매고 읽는다 읽을수록 문장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고 바람도 없고 거리와 골목은 비좁고 마침내 폐쇄된다 나는 남은 문장을 버리고 집을 나선다 이상한 해방감이 감돌면서 나는 찬 기운이 도는 길을 지난다

(전문.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문학과 지성사. 2005)

이 시는 표면적으로, 단단히 들어붙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읽는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문장이 얼음과 같다고 표현한다. 문장은 우리 삶의 여러 사태를 가리키는 것일 터인데 삶의 그 사태들은 아포리아, 즉 도무지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것들이어서 삶뿐만 아니라 그를 이해하려는 우리도 미끄러운 미궁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더 시적인 표현인 '얼음의 문장'이 아니고 '결빙(結氷)의 문장'이라 했을까? 얼음이 차갑게 얼어 있는 그 상태만을 나타낸다면 결빙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그 힘의 상태까지 고려한 것일 것. 즉 우리를 미궁의 악순환에 빠뜨리는 삶은 들여다보기만 하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운동 속에 있는 것이어서 '극도로 단단'할 뿐만 아니라 들여다볼 것도 없이 '투명'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극단적인 '이물질'이 되어 우리의 이해를 가로막는다.

좀 더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결빙'은 이데올로기의 능동적 수축이고 자기 횡단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쉽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움직이는 이데올로기는 훨씬 더 단단하여 우리 스스로도 그 끌어당기는 힘에 포섭되어 있다. 결국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고 바람도 없고 거리와 골목은 비좁고 마침내 폐쇄된다'는 정서는 시적이거나 낭만적인 것으로 이데올로기화된다.

그렇다면 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어떠한 결론을 우리는 기대해도 좋은 것일까? 결빙(結氷)의 문장을 읽기 위한 첫 번째 대안은 이 시처럼 '남은 문장을 버리고 집을 나'서는 것. 이러한 '찬 기운이 도는 길'의 해방적이고 아나키즘적 대안은 시인의 대안이 될 수는 있으나 현실적으로 결빙의 문장을 다 읽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또 다른 대안은? '결빙의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결빙의 문장에 읽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처럼 이야기하자면,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Fortuna)를 읽을 수 없다면 그녀를 달래어 우리의 이 운명을 호기(好機)로서의 포르투나로 바꾼다는 것. 읽을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가 시대에 읽혀 시대가 우리를 따라오도록 만든다는 것…. 어렵고 희망이 잘 안 보이는 시대가 시를 이렇게 따분하게 읽히게 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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