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일본 전범을 처벌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일명 도쿄재판)에서 연합국 측 검찰관과 판사들은 기소된 전범들의 화법(話法) 때문에 혐의를 입증하는데 매우 애를 먹었다. 검사나 판사의 질문에 대한 전범들의 답변은, 일본 정치학계의 '덴노'(天皇)라 불렸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같이 뱀장어처럼 미끈하고 안개처럼 애매"했다. 전형적인 일본식 책임회피 화법이다.
이런 태도를 B. 키난 수석 검찰관은 최종 논고에서 이렇게 질타했다. "…피고 전원으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그들이 맡고 있던 지위의 권위, 권력 및 책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침략전쟁을 계속하고 확대해온 정책에 동의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노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합니다."
이런 책임회피 화법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불행한 과거'라고 얼버무리고, '유감'(遺憾'1984년 히로히토)이나 '통석의 염'(痛惜之念'1990년 아키히토) 같은 애매한 표현으로, 사죄를 했는지 안 했는지 헷갈리게 해온 것이 일본의 사과 방식이었다. 진솔한 사과로 인정할 만한 '무라야먀 담화'와 '고노 담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총리의 '통렬한 반성'도 있었지만, 아베 총리가 보여주듯 우익들의 '뒤집기'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 일본의 '사과의 역사'였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교도(共同) 통신과 인터뷰에서 "사과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며 "(일본은)상대국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사과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일본이 우경화로 치닫는 가운데 나온 양심의 소리라는 점에서 참으로 반갑다. 그런데 찜찜하다. 우리나라를 포함, 일본 제국주의 피해국이 마치 일본에 끊임없이 사과를 요구해온 것처럼 들려서다. 진실은 우리가 일본 국민에게 피로감을 줄 만큼 끊임없이 사과를 요구한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사과를 하고 그것을 지켜가라는 것이다.
아베 총리처럼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연행'의 뜻이 없는 '인신매매의 희생자'라고 얼버무리는 것은 진정한 사과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문제는 사과의 화법이다. 직설적이고 명료한 화법의 사과여야 진정한 사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루키의 쓴소리는 2%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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