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쓸개 빠진 사람

자동차 부품업체의 중견 임원인 H씨는 국내외 출장이 잦고 회사일로 바쁜 중년 남성이다. 어느 날 그는 지방 부품업체와 계약을 논의하러 출장을 갔다가 저녁식사로 기름진 음식을 먹은 후 윗배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계약 논의를 다음 날로 미루고 호텔로 들어와 배를 움켜쥐고 아픔을 달랬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진통제 한 알을 먹은 후 통증이 약간 줄자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윗배를 만져보니 전날보다는 덜했지만 여전히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감기 치료를 위해 가끔 가던 인근의 내과의원을 찾았다. 내시경 검사에서 위장과 십이지장이 정상이었지만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지름 2㎝인 담석이 발견되었다. 담낭 벽이 두꺼워지고 팽창되어 있어 담석증으로 인한 담낭염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담낭 절제 수술을 받으라고 했지만 "어제보다 많이 나았으니 기다렸다가 바쁜 일 해결되면 병원에 가겠다"고 버텼다.

하룻밤을 더 자고 나니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 H씨는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고, 담석증은 잊고 지냈다. 한 달가량 지났을까. 지난번과 비슷한 윗배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 병원을 찾아온 H씨의 초음파 검사에서는 팽창된 담낭 안에 지름 2㎝ 크기의 결석도 보였다. 담낭 벽이 두꺼운 것으로 보아 급성 담낭염일 가능성이 높았다. H씨는 이튿날 복강경 담낭 절제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 하루 만에 퇴원했다.

담석증 환자들을 자주 만난다. 음식을 먹고 체했다며 즉석에서 양쪽 엄지손가락을 바늘로 따거나 동네의원에서 진료받고 위장약을 복용한 환자들도 상당수다. H씨는 "출장 다닐 때마다 복통이 생길까 봐 음식도 가리며 노이로제에 시달렸는데 드디어 걱정에서 해방됐고, 수술 후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통증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쓸개도 없느냐"라는 말을 한다. '쓸개 빠진 사람'이란 줏대가 없고 비굴한 사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아첨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쓸개(담낭) 안에 농축된 쓸개즙(담즙)은 알칼리 성분 때문에 대단히 쓰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듯이, 농축된 쓸개즙을 담고 있는 쓸개가 빠져 쓴맛을 잃어버린 사람은 비난받는다. 우리 조상들에게 스스로 비굴과 아첨으로부터 막아주는 버팀목은 바로 쓸개였다. 쓸개가 있는지 없는지는 사람 됨됨이를 가르는 기준이었다. 이건 신체의 유기적인 결함을 성질의 변화로 확대 해석해 나온 말이다. 의학적으로는 기질성 담석증을 치료하기 위해 쓸개를 제거한다고 해서 환자의 정신적 기개가 꺾이지 않는다. 담석을 제거하지 않으면 오히려 다시 통증이 생길까 봐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기개가 위축될 수도 있다. 문제가 있는 쓸개를 떼어내면, 즉 담낭 절제 수술을 받고 나면 정신적으로 담력이 더 커질 수도 있다.

강구정 계명대 동산병원 외과 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