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읍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허물어졌다가 1736년 새로 쌓은 것이다. 이후 세월 따라 허물어진 성을 1870년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던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했고, 병인양요(1866년)로 서양(프랑스)의 공격을 받았던 흥선대원군이 전국 각지의 성을 보수하도록 명령 했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두터운 성벽으로 서양의 총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구읍성은 중수 36년 만에 다시 허물어졌다. 높고 두터운 대구읍성을 허문 것은 적의 총포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자본이었다. 조선의 지도자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허물어졌던 것이다.
전통적 왕조국가가 두터운 성벽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면, 제국주의 상업국가는 도로와 철도, 무역을 통해 뻗어나가려고 했다. 성안에 머물며 기존 질서를 고수했던 국가들은 도로를 내고, 물자를 이동시키는 제국주의 국가의 제물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대구읍성은 '은둔형 왕조국가의 몰락'을 대변하고, 읍성을 걷어내고 닦은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는 '제국주의 상업국가의 혈관'을 상징한다.
대구시 중구청이 '대구읍성 상징거리' 조성사업을 진행 중이다. 읍성 돌과 읍성 터를 복원, 조형, 전시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역사에 대한 이해와 감상의 폭넓은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읍성거리 조성사업은 단순히 '대구읍성 상징물 복원과 전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대구읍성이 그 자체로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성이었다는 자료는 아직 없다. 난공불락의 성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역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대구읍성은 존재했었다는 사실보다, 무너진 왕조국가의 상징물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점에서, 성을 허문 자리에 제국주의 상업국가의 상징인 도로가 생겼다는 점에서 역사적 교훈과,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도시와 거리는 허공에 홀로 떠 있지 않다. 조선왕조가 읍성을 중수하면서 까지 지키고자 했던 가치, 중수 36년 만에 총소리 한번 없이 무너지는 과정, 읍성을 허물고 닦은 신작로와 그 자리에 들어선 동서남북성로와 각종 상업, 공업, 행정시설은 역사의 중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실체다.
북성로에서 일어나 조선 전역과 만주, 일본에 18개 점포, 4천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렸던 백화점 그룹 '미나카이'(현재 대우 주차장 자리)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승승장구하던 미나카이 백화점의 몰락은 제국주의 침략국가의 부질없는 욕망과 실패를 보여주는 아이콘이다. 대구읍성 상징거리 조성사업이 왕조국가와 제국주의 국가의 충돌과 몰락, 세계사의 흐름을 증언하는 사업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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