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아담스 가문 이야기

한국 기독교 선교역사의 3대 명문을 들라면 서울의 언더우드, 평양의 마펫, 그리고 대구의 아담스(J. E. Adams) 가문이 있다. 언더우드 가문의 4대에 걸친 헌신은 한국교회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펫 가문 또한 만만치 않은데,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교회의 기초를 놓음으로써 '한국장로교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특히 그의 사남인 하워드 마펫은 동산의료원에서 30여 년간 병원장으로 사역하였다. 2010년 9월 노구를 이끌고 대구를 방문한 그가 '초창기 선교사들이 목숨 걸고 사역했던 기본 원칙과 목적이 지금도 충실하게 지켜지고 있는가?'를 묻던 모습이 생생하다.

대구의 아담스 가문 역시 3대, 100여 년 동안 모두 38명이 일정 기간 이상 여러 가지 모양으로 봉사하였다. 아담스 가문이 대구와 최초로 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누이인 애니 로우리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영남지방 최초의 선교사였던 베어드의 부인으로 남편과 함께 부산과 대구 선교의 정초를 놓았다. 후에 평양으로 올라가 숭실학당 설립을 위시하여 찬송가 작사와 문서선교에 큰 족적을 남겼다. 암 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치료가 불가능하자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평양에 묻힐 것을 선택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였다.

아담스가 중국 해남으로 선교 갈 계획을 변경하여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은 그녀의 영향이었다. 베어드 가족이 부산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평양으로 사역을 옮겨 감에 따라 아담스가 대구 선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대구를 기점으로 경북지방 여러 곳에 교회들을 개척하였고, 또한 근대적 학교들을 설립하여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며 '대구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부인 넬리 딕 역시 '대구 기독교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로 존경받는 몸이었지만 산후 후유증으로 대구에서 숨진 최초의 선교사가 되어 그레이스 가든에 안장되어 있다.

아담스의 장남 에드워드는 출생 직후 부모와 함께 한국에 온 이래 42년 동안을 사역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북한 재령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지만, 대부분을 대구에서 사역하였다. 한국전쟁 때 귀국하지 않았던 몇몇 선교사 중의 한 사람으로 전쟁의 고통을 당하는 한국인들의 구휼에 힘썼다. 계명대학교 설립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는데, 현재 계명대 성서캠퍼스의 아담스 채플은 그의 이름을 기념하는 것이다.

아담스의 딸들 중 도로시는 평양외국인학교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될 때까지 사감으로 일했고, 메어리는 다른 선교사와 결혼해 직접 선교활동에 뛰어들었다. 다른 두 아들인 벤자민과 조지는 대구 출생으로 주로 안동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하였다. 특히 조지는 전쟁 후 농업 부문과 복지사업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또한 아담스의 손자 에드워드는 용산 육군기지 내 국방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그 후에는 국제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우리 지역 역사에서 명문가로 손꼽히는 경주 최 부자댁은 12대 400년 동안 만석꾼이었다. 하지만 그 집안이 명문인 까닭은 단지 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철학이 있는 부자였고, 민족의 고통에 동참하였으며, 후에는 전 재산을 육영사업에 투자했던 진정한 명문 가문이었다. 아담스 역시 병으로 인해 직접 선교 사역을 할 수 없게 되자 전 재산을 '아담스 전도기금'으로 출연하였고, 그의 후손들도 모두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날이 새기가 바쁘게 지도자들의 몰락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려면 각처에서 이와 같은 가문들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장차 우리 지역에서 세계를 섬길 지도자들, 그들을 배출하는 명문 가문이 많이 일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박창식 달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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