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순재의 힐링토크] 무당·비구니·호스피스병동…파격 소재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이창재 씨

영화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죽음' 통해 현실 되돌아보기 원해

영화
영화 '길 위에서'의 한 장면

'20대 초반, 나는 출가라는 카드를 제법 오랫동안 만지작거렸다. 삶에 상처받고 세상사에 지칠 때면 사람들이 왜 사는지가 궁금했고, 어떻게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견딜 수 있는지도 궁금했다.'(그의 책 '길 위에서' 서문)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이창재(48'중앙대 영상대학원교수). 그는 법대를 졸업하고 신문사, 광고기획사, 다큐멘터리 방송채널에서 근무하다 모든 걸 버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예술대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2006년 무당을 소재로 한 '사이에서'를 발표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후, 2012년 비구니의 일상과 수행을 다룬 '길 위에서'로 5만 관객을 모으면서 작품성과 흥행성을 갖춘 다큐멘터리감독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호스피스병동을 생생하게 담은 '목숨'을 찍어 화제를 모았던 그를 봄꽃이 한창인 중앙대에서 만났다.

-눈빛이 아주 강렬하다.

▶심각해서 그럴 것이다. 30대까지는 관념적인 세계에 빠져 남과 마음을 트면서 어울리지 못했다. 나의 고민을 이해받고 공유하고 싶었다. 이것이 영화의 길을 택한 이유인 듯하다.

-왜 다큐멘터리 영화여야 했나.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인 이야기로 보이지만 사실 감독이 원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아주 주관적인 장르다. 나에게 다큐멘터리는 긴 여행이며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 위안을 얻듯이, 다큐멘터리라는 여행을 통해 위안과 힐링을 받고 있다.

-영화작업이 힐링의 과정이라는 이야기인가.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욕망이다. 영화가 자신의 인생을 대변해 줄 것이라는 생각도 어리석다. 내 영화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며 그 질문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영화도 나를 이루는 작은 부분이다. 영화에 인생을 걸 것이 아니라 생(生)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영화는 모두 독특한 소재다. 무당, 비구니, 호스피스병동이 그렇다. 관심을 끌기 위한 선택인가.

▶어떤 소재를 택해야 관객의 마음을 끌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소재들 모두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있었던 질문들이다. 스스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혹은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들에서 출발한다. 한마디로 내가 뭘 보고 싶은가가 곧 소재다. 한 평론가는 내 작품 모두가 존재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사이에서'는 신과 인간, '목숨'은 삶과 죽음 사이에 대한 관심이라고 했다. 수긍할 만한 평이다.

-소재가 독특한 만큼 장소 선택이나 설득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 비구니를 촬영한 영천 은해사의 백흥암은 일 년에 두 번 문을 여는 곳이다. 외부 출입을 금하는 비구니들의 선원이다. 허락을 받기 위해 무수히 절을 찾았다. 육문 스님이 마침 허락했는데도 촬영하는 10개월 동안 다섯 번이나 쫓겨났다. 호스피스병동 역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이 촬영이 뒤에 따라오는 분들을 위한 지도를 남겨주는 의미라며 설득했다. 굉장히 소중한 이 지도를 잘 포장해서 많은 사람들한테 선물처럼 보여줄 것이라고 설명해 결국 협조를 얻어냈다. 진심은 통한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오목거울이나 볼록거울이 안 되도록 균형을 잡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그 세계를 보여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감독의 호기심과 관객의 호기심이 한데 어우러져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지난해 말 죽음을 다룬 영화 '목숨'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죽음을 가지고 장난치느냐 장사하느냐는 말까지 들었다. 또 어떤 이는 '왜 우리가 죽음에 대한 영화를 봐야 하느냐'며 항의도 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관심은 오랫동안 나의 숙제였다. 이와 관련된 책도 많이 읽었고 언젠가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06년부터 구체적인 준비를 했으나 너무 빠져들까 두렵기도 하고 겁도 나서 미루고 있었다. 특별한 계기를 겪으면서 작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무슨 계기인가.

▶소중한 가족과 친구를 연이어 잃었다. 또 이 작업을 위해 장소 헌팅을 하면서 나 또한 크게 다쳐 수술까지 하게 됐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죽음이라는 주제가 나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말하자면 어떤 '사명'이 나를 이 작품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겠다. 10개월 동안 환자들과 함께하며 마음이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은 어려운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죽음이라는 소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영화를 보면서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원했다. 그 시간을 통해 출발점이든 목적지든 헤매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지 않고 잘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삶의 스펙을 쌓느라 지쳐서 영혼의 스펙 쌓기를 등한시하고 있다.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알아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느낀 점도 많았겠다.

▶가장 놀랐던 점은 환자들이 죽음 자체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1년 정도 촬영하면서 80명의 죽음을 봤다. 주검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과연 내가 무슨 짓을 하는가 하는 생각에 무척 힘들었다. 지난해 부산영화제를 위해 17번 이상 편집하고 수정했다. 편집 과정에서 수백 번의 죽음을 다시 봐야 했다. 7개월 동안 술을 먹지 않고 잠들 수가 없었다. 담배도 다시 피우게 됐다. 내 영화지만 영화관에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아주 힘들었다.

-당신의 마지막도 생각해 봤겠다.

▶아주 빨리 받아들일 것 같았다. 가톨릭적으로 순명하는 것이다.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할 것 같다. 죽어서 가는 곳이 실체와 고향이다. 이곳은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영화를 하게 됐나.

▶고등학교 때 미술공부를 했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공대에 갔고 공대는 적성에 맞지 않아 다시 법대에 갔다. 처음 직장은 기자였다. 그런데 기자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1년도 다니지 않고 그만두었다. 아주 큰 기획사에 들어갔는데 그 당시만 해도 기획사는 무척 자유분방했다. 이것도 맞지 않았다. 마침 그 기획사에서 다큐멘터리채널을 새롭게 만들었다. 그곳으로 옮겼다.

-다큐멘터리 작업은 적성에 맞았나.

▶아무것도 몰라 몇 년간은 모두들 같이 일하기 싫어했다. 기피 인물이 된 셈이다. 공부를 했다. 다큐멘터리 작품 세 편을 6개월 동안 외우다시피 보고 또 봤다. 그랬더니 다큐멘터리에 대해 자신이 생겼다. 그 후로 승승장구해 35세에 최연소 팀장이 되었다. 이 무렵 하나의 사건이 생겼다.

-무슨 사건인가.

▶새로운 소재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 '학출'(학생 출신) 노동자의 삶을 다룬 작품을 만들었다. 당연히 태클이 들어왔다. 윗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처음 의도와는 다른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30대 중반 참으로 겁 없던 시절이었다.

-유학의 길을 택했다.

▶영화를 공부하고 싶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유학을 간다니 모두들 반대했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비장해졌다. 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시카고대학에서 3년 공부하고 졸업작품으로 한국에서 만들었던 학출 노동자를 다룬 작품을 제대로 만들어 제출했다. 'EDIT'라는 이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선정한 '세계 30대 다큐멘터리전'에 뽑혔고 미국의 각종 매스컴에서 다루었다. 이 과정을 통해 한국에서 받은 상처가 치유되었다. 국내서는 아직 상영하지 못하고 있다.

-졸업 후 2004년 바로 국내 대학의 교수가 됐다.

▶운이 좋았다. 매 학기 첫 수업시간이면 교수라고 부르지 말고 먼저 길을 가는 사람인 '선생'으로 불러달라고 말한다. 스승으로서의 선언이 아니라, 가르치는 입장에서 스승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다.

-교수와 감독 두 가지를 함께 잘하기란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교안을 만들고 새로 과목을 개설하고 그런 것들이 재미있었다. 가치도 느꼈다. 2006년 첫 작품 '사이에서'를 만들고 다음해에 결혼했다. 아이도 태어났다. 영화도 잘 만들고 좋은 선생도 되고 훌륭한 가장도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학교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30일 넘게 산티아고 길을 걸었나.

▶2008년 급하게 준비도 없이 출발했다. 그 길에서 복음을 얻지 않을까 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걸었다. 그 끝의 하루를 남겨놓고 문득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선생이었던 적이 있었던가'라는 질문에 다다랐다. 돌아가서 1년만 선생다운 선생을 해보고 그다음 결정하기로 마음먹고 한국에 왔다.

-학교는 그만두지 않았다.

▶40세 이후 삶의 밸런스를 찾아가고 있다. 그동안 나 스스로에게 너무 혹독한 삶을 살았다. 대가도 많이 치렀다. 이젠 거울 앞에 돌아온 누이처럼 나를 성찰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업 영화를 찍을 생각은 없나.

▶상업 영화는 내가 찍고 싶은 것을 관객에게 일정량 양보해야 하고, 투자자에게도 일정량을 떼 주어야 한다. 그냥 찍고 싶은 것을 찍고 싶다. 나는 영화를 통해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거나 이런 생각이 없다. 1년에 90편 정도 독립영화가 생산되고 이 중 30~40편이 다큐멘터리 영화다. 3만 명 관객도 대단한 것이다. 상업 영화와는 지향점이 다르다.

-다큐멘터리의 매력이라면.

▶다큐멘터리 영화는 직접 체험하고 공부할 수 있기 때문에 재미있다. 또 언젠가는 부족한 부분이 완성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지속적으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다.

-다음 영화는.

▶비워놓은 상태다. '목숨'을 찍고 난 이후 어떤 주제가 나의 마음에 차오를 때까지 내버려두고 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려 하는 것은 욕심이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lily_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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