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꿈꾸는 인문학] 그래도 인문학을 하려고 한다②

여러분은 지금까지 속아왔어요. 부자들은 인문학을 배웁니다. 여러분은 배우지 않았어요. 인문학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사고하기 위해, 여러분을 공격하는 무력에 단지 대응만 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토대입니다.(얼 쇼리스의 '인문학은 자유다' 중에서)

미국의 언론인이자 사회비평가인 얼 쇼리스가 1995년 뉴욕 베드퍼드힐스 교도소를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만난 한 여자 재소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삶을 살게 되었나요?" 여성 수감자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정신적 삶이 없었기 때문이죠." 쇼리스가 다시 물었습니다. "정신적 삶이라뇨?" "왜 있잖아요. 독서나 강의 박물관 같은 거 말이에요." 그것을 계기로 시작된 클레멘트 코스(소외된 이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되었다는 측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했다는 부분입니다.

그렇습니다. 경제적인 자립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적, 인격적 성장입니다.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싸워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 돈 벌고 부자 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바가 없는 삶이 현재라는 것, 자본이 인간을 사물화하고 도구화하여 나 자신조차도 사물이 되어버렸다는 것, '나는 혼자다'라는 고립된 개인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인문학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푸른 신호등을 보고 달려갔다가 도로 중간에서 갑자기 붉은 신호등으로 바뀌어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느낌. 그래도 해보려고 합니다. 많은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다른 곳도 아닌 교육청 공문에서 인문학 관련 정책을 만나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육청에서 하는 정책이라면 모두 부정하는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인문학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인문학 정책이 진행되면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성찰은 어디론가 가고, 배부른 돼지의 값비싼 취미가 되든가, 배부른 돼지가 되기 위한 전략에만 그칠지도 모른다고. 사실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걸 고민하다가 인문학 위기론이 나온 이후 10년이 흘렀습니다. 최소한 정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만큼 인문학이 관심을 받게 된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인문학을 가까이하는 과정에서 배부른 돼지도 생각이 바뀌고, 배부른 돼지만을 꿈꾸는 사람도 변화하고, 진정 의미 있는 소크라테스들이 자기성찰의 무기를 들고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문학을 하는 이유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는 그렇게 진행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인문학이 아닐까요? 기존의 편협한 잣대로 정책을 폄하하거나 비판한다면 정말 세상에는 배부른 돼지만 남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분명히 시대는 인문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인문학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그런 사람들까지도 소통하면서 연대하여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성과에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비판하는 사람들도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진정한 인문학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편견을 버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작은 부분부터 챙길 필요가 있습니다. 인문학은 작고 어두운 부분을 보는 과정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러한 작은 부분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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