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내가 소년이 되어 암소를 몰고 고향으로 가는데, 암소는 산맥같이 우람하고 온 몸이 흰빛이었다. 꿈속에서도 어린 내가 이런 암소를 몰아보다니 하며 감격해 마지않았는데 그 암소가 마을 입구인 외기내 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고삐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가가 발에 걸린 고삐를 풀어주자 거대한 산맥은 일어서서 나를 향해 선하고 큰 눈망울을 굴리는데 그 눈빛이 어디선가 꼭 한번 본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리고 "시영인감? 나 인터넷에서 방금 자네 시 낭송하는 것 봤구만. 「만월」이었던가 「서시」였던가. 하여간 뭉클해서 지금 바로 전화 넣는구만." 목소리가 영락없는 용택씨였다. 그 와중에도 이 창포잎 같은 꿈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였으나 차안(此岸)의 시간은 오전 9시 40분, 나는 암소가 간 곳을 이미 모른다.
(전문.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창비. 2012)
이 시는 절집 벽에 그려진 심우도(尋牛圖)를 연상케 한다. 심우도 혹은 십우도는 소로 표상된 우리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10개의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중간에 나오는 김용택 시인의 삽화만 아니었다면 이 시는 훨씬 더 건조한 시가 되었을 터이다. 어찌하였든 우리는 우리의 흰 소가 어디 갔는지 모른다. 이러한 표현이 허락된다면, 이 '상식적 도통함과 비통함'에 우리는 식상하다.
물론 시인에게 소는 깨달음 이상의 존재다. '중학교 일학년 일학기 때였다. 하굣길에 아래냇가 방천 둑에서 소를 뜯기고 있던 아버지를 만났다. 다가가 모자를 벗고 인사를 올렸더니 아버지가 진짜 소처럼 웃었다.'(「소처럼 웃다」 전문)에서처럼 소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여기서 아버지는 깨달음의 존재가 아니라 소와 함께하는, 자식과 함께하고 싶은 그러한 존재. 그렇다면… 다시 시를 보자. 시인은 암소가 간 곳을 '이미' 모른다고 표현했다. 진리를 찾는 일이 '창포잎'처럼 맑은 일이나 그것을 시인은 이미 흘려보냈다. 꿈도 소중하나 보고 싶은 누군가에게 차안의 시간을 그는 내주고자 한다. 피안의 흰 소가 아니라 이곳 차안의 시간과 공간에 그는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를 인용하면서 자꾸 이 시가 실린 시집의 제목이 눈에 걸린다.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같은 제목의 시에서 2009년 용산의 비극을 담담히 기록하며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애초에 경찰은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거민 또한 그들을 전혀 자신의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
모두가 흰 소를 찾아가는 존재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는 낯선 존재인 세상. 암소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 채 정치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나 흰 소만이 정치를 능가한다고 주장하는 것 모두 어리석다. 곁의 누군가가 문득 보고 싶어 전화 걸어온, 우리 곁의 모든 '용택씨'가 암소 아닐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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