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태맹의 시와함께] 빨래가 마르는 시간

사윤수(1964~ )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빨래가 널려 있다

이동 건조대 가득 큰 대자로

위쪽은 나란히 직수굿하고

아래는 넌출진 구비를 드리운다

세탁기 속에서 혼비백산

그 컴컴하고 거친 물살을 통과한 기억이

빨래에게는 없는 것 같다

머릿속까지 표백 되었을지도 모르니

세상에는 매달려 견디는 것들이 많다

나도 어떤 것에 안간힘으로 매달려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던 때가 있었다

외줄을 잡고 젖은 빨래처럼 허공에서 뒤채었다

씨앗이 여무는 시간도 그러했으리라

양 팔 가득히 빨래를 걸치고 서 있는 건조대가

수명 오래된 한 그루 빨래나무 같다

은결든 물기와 구김을 다림질 해주듯

햇볕이 자근자근 빨래의 등뼈를 밟고 다닌다

어느 어진 이의 심성과 순교의 윤회일까

제 본분인 양 빨래는

모짝모짝 부지런히 말라간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그 배경에 잠풀 향기 은은하다

(전문. 『파온』. 시산맥사. 2012)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지배 논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산포된 수많은 가상과 상징의 자기 작동이라는 것. 그러다가 이 시가 눈에 들어왔다. 컴컴한 기억마저 이내 표백해 버리고 사람들은 어딘가에 매달려 삶을 견디고 있다. "물론 눈물겹게 나도 어떤 것에 안간힘으로 매달려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던 때가 있었다." 그것이 씨앗이 여물고 햇볕을 받아들이는 시간일지, 젖은 빨래의 무한 반복의 시간일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은 여전히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라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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