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도 관물(官物)이니 두고 가자." 조선 선조 때인 1584년 경상도 인동현감으로 부임한 이등림(李鄧林)은 그해 12월 인동을 떠나게 됐다. 그때 현의 아전이 현감의 여종에게 짚신 한 켤레를 주었다. 이를 안 현감이 "짚신도 관물이니 두고 가자"고 하니 여종은 관아에 있던 바위에 걸어두고 떠났다. 뒷날 고을 사람들은 그 바위를 '괘혜암'(掛鞋巖'신을 걸어둔 바위)이라며 세 글자를 새겼다. 지금도 남아 있는 괘혜암은 뒷사람의 귀감이 되었다.
몇 년 뒤 임진왜란 중이던 1594년 이보(李輔)가 인동현 둔전관(屯田官)으로 부임했다. 그는 군량미 보급과 천생산 축성 등 전쟁 중 공로로 조정의 인정도 받았다. 선정으로 주민 칭송까지 받으며 그는 1601년 다음 부임지 거창현으로 가게 됐다. 인동을 떠나면서 "말채(馬鞭)도 관(官)의 물건이나 두고 가자"고 했다. 그가 두고 간 말채가 세월이 흐르며 낡자 후임 현감은 화공에게 말채를 그리게 하고 '화편'(畵鞭'그림 말채)이라 부르며 관아 벽에 걸어두었다.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보의 형으로 서애 류성룡(柳成龍)에게 함께 가르침을 받은 이진(李軫)도 동생처럼 깨끗한 관리의 삶을 살았다. 임진왜란 중 진보현감으로 부임할 때 말 한 필을 몰고 갔다. 그런데 현감자리를 그만두고 떠날 때 말이 새끼를 낳아 두 마리로 늘었다. 그러자 그는 "이 말은 이 고을의 것이거늘 어찌 내 것이라 하겠는가?"라며 한 마리만 데리고 갔다.
청렴한 관리 이야기에는 유학자 장현광(張顯光)도 빠지지 않는다. 그는 1595년 충청도 보은현감으로 6개월쯤 근무하다 그만두었다. 부인과 함께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지점에 왔을 때다. 부인이 못 보던 비단 속옷을 입은 것을 알았다. 사연을 물으니 "이웃사람이 정표로 주었다"고 하자 "명분 없이 값진 선물을 받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며 나무랐다. 부인은 비단 속옷을 벗어 바위에 두고 떠났다. 지금도 '치마바위' 또는 '속곳바위'라 불리고 있다.
요즘 금품을 둘러싼 추문과 비리, 사건이 연일 터지면서 공직사회와 정치권의 진흙탕 모습이 말이 아니다. 얼마 전엔 공직사회의 고액 외부 강의가 말썽이 됐다. 힘있는 부처 공직자일수록 기준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기준을 만든 사람도, 그 기준을 어기고 뭉개는 사람도 공직자다. 옛 관리를 다 본받을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배울만한 것은 받아들이자. 스스로 만든 규정이라도 지키고 자신에게 엄격해져 보려는 흉내라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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