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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들었어도 소일거리 있으면 젊게 사는 거지

테니스를 즐기는 김종수 할아버지
테니스를 즐기는 김종수 할아버지
상추에 물 주는 문대전 할머니
상추에 물 주는 문대전 할머니
지난해 1월 1일 문대전(가운데) 할머니와 아들 정원복(오른쪽) 씨, 정 씨의 고향 친구 김기태 씨가 함지산 등산 성공을 자축하며 정상에서
지난해 1월 1일 문대전(가운데) 할머니와 아들 정원복(오른쪽) 씨, 정 씨의 고향 친구 김기태 씨가 함지산 등산 성공을 자축하며 정상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매일신문 DB

20대 중반 남성들끼리 모였다 하면 '기-승-전-군대 이야기'로 분위기가 흘러간다. 2년 남짓한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일을 겪었기에. 이런 '수다 본색'은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다. 코흘리개 꼬마도 유치원에서 소풍 한 번 다녀오면 잠들 때까지 소풍 갔던 일을 가족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느라 밤샐 기세다. 짧게는 하루, 길어도 2년이란 시간이 이런데 하물며 한 세기 이상 혹은 한 세기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 이야기는 오죽 많을까?

◆오전, 오후 하루 두 번 테니스 하는 할아버지

지난달 28일 오후 3시 30분쯤 대구 서구 평리동에 있는 근린공원 테니스장에서 대구 최고령 테니스 애호가를 만났다. 주인공은 강원도 출신 김종수(88) 할아버지. 호적상 김 할아버지는 1928년생으로 되어 있다. 김 할아버지가 태어났을 때 만해도 일찍 죽는 아기가 많아 출생 신고가 늦었다. 김 할아버지의 실제 나이는 1927년 1월 17일생이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던 김 할아버지는 결혼 대목에서 "내가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일 때 결혼했어"라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김 할아버지 나이 15세이던 1942년 첫 혼인을 치렀다. 당시 일본이 조선인 여자를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해 이른 나이에 김 할아버지는 같은 마을에 살던 동갑내기 여성과 혼인했다. 그리고 1948년에 첫 자녀를 얻었다. 득남의 기쁨에 이어 1950년 강원 경찰에 임용되면서 처음으로 직장도 얻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김 할아버지는 23세 때 홀아비가 됐다. 경찰이었던 김 할아버지는 전쟁 때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됐다. 어느 산 토굴에서 생활하던 중 아내가 아이를 안고 사라지는 꿈을 꿨다. 할아버지는 전장 이동 중 고향 마을 인근에 이르러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아내와 자녀가 인민군에게 죽임당했단 사실을 알게 됐다.

김 할아버지는 "믿고 싶지는 않지만 사람 인연이란 게 이래서 묘하다. 우리 인연이 끝났다고, 이제 떠나간다고 꿈에라도 인사하고 가니깐 말이야"라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면 크게 후회되는 일이 있다. 6'25전쟁 때 경북 울진에 주둔하던 중 한 농군이 김 할아버지에게 헐레벌떡 뛰어와 공비가 나타났다고 신고했다. 현장에 가보니 인민군복을 입은 17세 소년병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대가 고립돼 궁지에 몰리자 귀순하러 왔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그 소년병이 비록 바보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전투 능력이 탁월해 우리 정부로부터 순경 발령을 받고 금세 경위까지 승진했다고 기억했다.

김 할아버지는 "그가 1959년에 한쪽 다리가 없는 모습으로 나를 찾아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는데, '귀순 후에 살아남고자 바보처럼 살았으며 전쟁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는데 이렇게 불구가 됐다.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 이 꼴이 됐는데 누구도 나를 돌봐주지 않는다'며 울먹였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도 춘천시장에서 다 떨어진 경찰 모자와 제복을 입은 남루한 모습으로 구걸하는 그를 외면했었다"고 말했다.

90년 가까이 살며 후회와 아쉬움이 많은 삶을 살아온 김 할아버지에게 테니스가 삶의 낙이다. 아침에 일어나 식전에 자전거를 타고 집 가까이 있는 학교에서 동네 할머니들에게 테니스를 가르쳐주고, 함께 공을 치기도 한다. 매일 오후 3시만 되면 근린공원 테니스장에서 한 두 게임 즐긴다.

김 할아버지는 "젊어서 배운 테니스 덕분에 젊은이(60'70대를 뜻한다)와 할머니들이 나랑 같이 놀아주니깐 아주 좋지"라며 "이 나이에 욕심이 없어야 하는데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했어. 근린공원 테니스장 양옆으로는 펜스가 있는데 앞뒤로 펜스가 없어서 노인네가 공 주우러 다니기 불편해. 이걸 좀 해주면 좋겠는데"라며 또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주말마다 산 타는 할머니

대구 북구에 유명한 할머니가 있다. 주름진 얼굴에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활짝 웃을 때 보면 이도 거의 다 빠져 영락없는 노인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등산할 때 함박웃음을 짓는다.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이다.

문대전(105) 할머니는 1909년 6월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 진산리에서 태어났다. 때는 바야흐로 일본이 한반도 침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시기.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6'25전쟁, 산업화 등 할머니가 보고 들은 것만으로도 이야기보따리가 여럿이겠건만 옛 이야기를 물으면 그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이 없다. 문 할머니는 옛 기억이 별로 없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옛 기억은 문 할머니 나이 마흔이 넘어 대전에서 경상도 남자 중매로 알게 된 남자와 6'25전쟁 때 함께 피란 다니다 결혼하게 됐다는 정도다.

맏아들인 정원복(52) 씨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만나기 전 상황에 대해 물어보면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신다. 7년 전 어머니 건강이 나빠지셨고 치매 초기 증상도 보였는데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7년 전 건강이 나빴고 치매 초기 증상도 나타난데다가 105세의 고령인 할머니가 주말마다 등산하러 다닌다고? 못 믿겠지만, 사실이다. 지난해 건강 검진 때 문 할머니는 관절 나이 70대, 혈액 나이 20대라는 결과가 나왔다.

7년 전 문 할머니와 함께 살던 아들 원복 씨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겨우내 할머니는 냉방에서 잠들어야 했다. 여름에도 선풍기 한 번 켜지 못하고 찜통더위를 온몸으로 견뎠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잦았다. 몸이 축날 대로 축난 문 할머니는 100세가 되던 해 치매 증상이 나타나며 정신이 흐려졌다.

원복 씨는 "퇴근 후 어머니께 인사 드리니 어머니가 저를 보고 '누구십니까?'라고 물어봐, 먹고사는데 정신이 팔려 어머니께 소홀했단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 처음으로 어머니를 목욕도 시켜 드리고 건강을 회복할 방법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고 말했다.

5년 전 어느 일요일 오후 원복 씨는 문 할머니와 함께 바람도 쐴 겸 북구 구암동 함지공원에 들렀다. 이날 문 할머니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꽃도 보고 하늘도 보고 행복해 했다. 그렇게 문 할머니는 매주 토요일마다 아들과 함께 함지공원에 산책하러 나가 외로움을 달래면서 조금씩 맑은 정신을 되찾았다. 함지산과 팔공산, 칠곡 가산산성, 경주 무장산 등 각지를 돌며 아들과 나들이를 즐겼다. 지금 문 할머니는 치매 증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하다.

지금도 문 할머니는 집에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아들이 출근하고 나면 파, 멸치를 다듬는 등 찬거리를 준비한다. 또 문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채소인 상추도 직접 기른다. 빨래를 정리하면서 원복 씨 옷에 떨어진 단추가 있으면 바느질도 직접 한다.

문 할머니는 "소일거리라도 하지 않으면 더 늙는 거야"라며 웃었다.

홍준표 기자 agape1107@msnet.co.kr

◆젊은이들에게 주는 당부의 말

취재하며 만난 문대전 할머니와 김종수 할아버지는 젊은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어른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했다. 문 할머니와 김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에게 전하고픈 말을 새겨들어보자.

문 할머니는 노인정을 다니다 보면 '요즘 효가 사라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에게 효를 강요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이 든 사람들이 삶으로 효를 보여주라고 했다.

문 할머니는 "남한테나 내 부모한테 잘하면 세상 사람도 나한테 잘해줘. 사람은 좋은 사람한테 좋게 대하고 나쁜 사람에게 나쁘게 대하거든. 그게 세상살이야. 그런데 어른에게 잘하라고 가르칠 필요없이 내가 어른 잘 모시면서 살면 내 자식도 그걸 보고 배우는 거야"라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이만큼 세상을 살아보니깐 공부 잘한다고 똑똑한 게 아니다. 세상 경험을 무시하면 안 된다"며 "사회 경험이 없으면 세상을 보는 눈도 그만큼 넓지 못하다. 그래서 젊어서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늙은이들도 늙은이 사회에서 서로 배려하면서 맞춰 살아야지 집에서 어른이라고 밖에서도 어른 행세하려고 하면 노인정에서도 왕따가 된다"라며 노인들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홍준표 기자 agape1107@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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