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포화가 한반도를 휩쓸던 1950년 9월 14일, 사흘치의 비상식량과 탄약만 지급받은 채 2천700t급 LST(상륙선) 문산호에 몸을 실은 학도병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770여 명의 육본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 병력을 싣고 부산에서 출발한 배가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안에 이른 것은 새벽녘이었다. 그제야 '장사 해안에 적전상륙,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하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때마침 동해안을 강타한 태풍으로 배는 좌초했고, 해송에 매단 밧줄에 의지한 필사적인 상륙이 감행되었다. 파도에 휩쓸리고 인민군 총탄에 쓰러진 대원이 부지기수였다. 10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고지를 점령한 유격대원들은 폭우와 어둠 속에 인민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다가 20일 아침에야 부산항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의 소식을 들었다.
장사상륙작전은 인민군에 대한 기만전술을 펼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양동작전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렇게 유엔군은 인민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며,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의 전기를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수도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전세를 반전시켰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기를 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양동작전이 전개되었다. 연합군의 상륙이 영불해협의 연결항구인 칼레 북쪽 지역으로 이루어질 듯한 위장전술을 펼쳐 독일군의 주의와 병력을 분산시킨 것이다.
양동작전에는 그만한 희생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장사상륙작전에서도 140명에 이르는 학도병이 꽃다운 목숨을 바쳤다. 정작 더 서러운 것은 잊힌 작전으로 전사(戰史)에서조차 외면당한 것이었다. 장사상륙작전 현장에 전몰용사위령탑을 세운 것도 살아남은 전우들이었다.
총성과 포연으로 얼룩지고 학도병들의 피로 물들었던 장사리 해안에 문산호가 다시 등장했다. 당시 작전에 투입된 상륙함 '문산호'가 65년 만에 장사리 해안으로 귀환한 것이다. 부산 조선소에서 실물 모형으로 복원, 건조한 배를 바지선으로 옮겼다. 문산호는 내년에 준공하는 장사상륙작전 기념공원의 스토리 전시관으로 활용할 방침이라고 한다. 장사십리 바닷가가 호국정신의 교육현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모래톱에 묻혀 있던 어린 충혼들이 이제라도 편히 잠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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