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국회의원 부음 기사

공무원연금 개혁 무산을 지켜보는 국민 심정은 참담하다. 우리 정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하는 실망과 함께 '국회 무용론(無用論)'이 무성하다. 정치권에 실망하고 비판을 쏟아낸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번은 양상이 심각하다. 유권자 대다수가 내년 4월 총선 때 두고 보자며 벼르고 있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인상 명기'를 둘러싼 여야 정쟁 탓에 공무원연금 개혁은 좌초했다. 공무원연금 개혁을 하다 엉뚱하게 국민연금을 건드려 공무원연금 개혁이 흐지부지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주(主)가 공무원연금이고 객(客)이 국민연금인데 객인 국민연금 때문에 주인 공무원연금 개혁이 무산됐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상향이 문제가 될 줄 새누리당'새정치민주연합이 몰랐다면 무능(無能)이고, 알았다면 공무원연금 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꼼수이자 직무유기다.

여야가 욕을 얻어먹은 까닭은 이것만이 아니다. 4월 국회 마지막 날인 6일 상황을 복기해보자. 이날 공무원연금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가 싸우는 바람에 법안 100여 건이 처리되지 못했다. 여기엔 연말정산 환급을 위한 소득세법 개정안, 영세 자영업자의 숙원 과제인 상가 권리금 보호를 위한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개정안 등이 포함됐다. 경제살리기, 민생(民生)을 뻔질나게 외치는 국회의원들 말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났다.

나라의 자존심이 걸린 안건도 여야 다툼 때문에 처리되지 못했다. '침략 역사 및 위안부에 대한 반성 없는 일본 아베 총리 규탄 결의안' '일본 정부의 조선인 강제징용 시설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규탄 결의안' 등이 빛을 못 봤다. 어느 나라 국회의원인지 의심스럽다는 비아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쏟아지는 비판을 뒤늦게나마 알아챈 여야가 12일 소득세법 개정안 등 법안 3건, 아베 총리 규탄 등 결의안 2건을 처리했다. 하지만 대학생의 학자금 대출 상환 부담을 덜어주는 취업 후 학자금 상환 특별법 개정안 등 국민 생활과 밀접한 법안은 계속 표류하고 있다. 여당 원내대표가 "국민 보기에 부끄러운 상황"이라고 개탄하는 지경이다.

우리 정치판을 보며 미국 정치인 톰 폴리가 떠올랐다. 1989년부터 5년 반 동안 하원의장을 지낸 그가 2013년 별세하자 워싱턴포스트는 1면에 부음(訃音)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고인은 워싱턴의 당파적인 정치행태에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다"며 '합의 도출자 하원의장'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는 1982년 상대 당인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조세 개혁 방안을 지지하는 '정치적 용기'를 내자고 동료 민주당 의원들에게 역설했다. 그를 두고 "'정치'를 '나라'보다 앞에 두지 않은 인물" "정파를 초월한 합의와 협력을 몸으로 보여줬다" "거인이 쓰러졌다"는 후인(後人)들의 평가가 쏟아졌다.

합의의 정치, 타협의 정치가 사라진 우리 정치판에 폴리 의장과 같은 인물이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선(多選)은 많아 거물은 넘쳐나지만 거인(巨人)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인이 거인이란 평가를 받으려면 개인적'정파적 이해득실보다 국가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이 속한 국민과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마쳤다면 그는 평안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다"는 넬슨 만델라의 금언(金言)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청렴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비전을 보여줘야 거인이 될 수 있다.

전'현직 국회의원이 세상을 떠나면 신문마다 부음 기사가 실린다. 한 사람의 삶을 축약해 보여주는 것이 부음 기사라 할 수 있다. 몇 선 의원, 어떤 자리를 지냈다는 경력을 쭉 나열하는 부음 기사도 좋겠지만 정치인이라면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는 평가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막말 의원' 'OOO 리스트에 오른 인물'이란 내용이 부음 기사에 들어가선 정말 곤란하지 않을까. 시간을 내 국회의원 모두가 자신의 부음 기사를 한 번 써보기를 권한다. 정치 수준 올라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힘들더라도 국회의원 언행은 조금이나마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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