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교향곡 5번 에피소드

1969년 서울생. 서울고등음악원. 대구MBC라디오
1969년 서울생. 서울고등음악원. 대구MBC라디오 '권오성의 귀를 기울이면' 진행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BBC 방송은 자국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매일 베토벤 교향곡 5번 1악장을 방송했다. 베토벤이 적성국 작곡가라는 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지만 교향곡 5번이 지니는 보편성은 국가를 초월한 가치라는 점을 방증하는 에피소드다.

우리에게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교향곡 5번은 일본과 한국을 제외하면 대개 'C단조 교향곡'으로 불린다. 베토벤의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는 베토벤이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고 곡에 대한 메모를 남겼다고 했고 일본 음악학자에 의해 '운명'이란 부제가 붙었다. 하지만 이는 신뢰하기 힘들다. 안톤 쉰들러는 베토벤 사후 돈벌이를 위해 베토벤의 편지와 메모를 조작했고 이를 비싼 값에 팔았다. 20세기가 돼서야 쉰들러의 조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베토벤에 대한 이미지는 '운명'으로 상징되는 이미지로 굳어졌다.

독일 음악사학자 '파울 베커'는 교향곡 5번 각각의 악장에 '투쟁', '희망', '의심', '승리'라는 부제를 달았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되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이 혼돈으로 치닫던 시절 만들어진 이 작품은 베토벤이 갈구하던 시민계급의 상징으로 여길 수 있다. 베토벤의 제자 '카를 체르니'에 의하면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빈의 한 공원에서 노랑촉새 소리를 듣고 악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또 다른 의견은 당시 농민들의 투쟁가에서 동기를 얻었다고도 한다. 어찌 되었건 쉰들러의 조작 그리고 일본에서의 해석처럼 비극적 운명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운명이라면 시대에 저항하는 적극적 자세가 어울린다.

하이든에 의해 개척된 교향곡은 모차르트를 거치고 베토벤에 와서 형식과 내용이 완성된다. 베토벤 전까지 교향곡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규모 편성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20명 이하가 일반적이었고 바이올린을 제외한 악기는 주목받지도 못했다. 베토벤은 달랐다. 목관악기와 현악기에 충분히 역할을 배분했다. 편성도 현대의 오케스트라와 같은 모습이었다.

베토벤은 귀족사회가 소유하던 음악을 시민사회의 영역으로 가져왔다. 그는 20살이 되면서 귀족계급의 상징이던 반바지를 벗어버리고 긴 바지를 입었다. 당시 긴 바지는 공화주의자의 상징이었고 새롭게 생겨난 시민계급의 상징이었다. 스스로 하층계급을 상징한 베토벤은 클래식 음악을 저택에서 연주회장으로 옮겼고 돈만 낼 수 있다면 누구나 소비할 수 있는 영역으로 만들었다.

오케스트라는 시민계급의 상징이다. 18세기 중산층과 시민계급은 힘을 모아 도시를 대표하는 교향악단을 만든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의 오케스트라는 대부분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교향악단은 그 도시 시민계급의 민도를 규정하는 상징이다. 흔히 사용하는 '필하모니'라는 말도 '하모니를 사랑한다'는 희랍어에서 나온 말로 음악애호가가 만든 오케스트라를 말한다.

베토벤이 유독 오페라와 가창곡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이유도 기악곡 특히 교향곡을 통해 시민계급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여전히 귀족계급의 전유물이던 오페라는 베토벤에게 있어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사랑타령 일색인 가창곡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베토벤은 하이든 이래 교향곡 3악장이 지녀 온 미뉴에트 형식마저 폐기한다. 이탈리아어로 익살 또는 조롱을 의미하는 스케르초를 도입하여 기존 가치에 대한 풍자를 담는다.

무한과 절대성에 가까운 사유의 자유. 그리고 이어지는 세계정신은 베토벤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이다. 자유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베토벤은 오케스트라와 교향곡 5번을 통해 구현했다. 베토벤에 와서 고전음악은 더 이상 궁정이나 귀족의 저택에 머물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시민은 자신들의 영역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 베토벤이 볼썽사나운 반바지를 벗어 던지고 긴 바지를 입은 덕분이다.

권오성/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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