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고3의 받아쓰기 시간1

요즘 날이 더워지고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이 힘들다 보니 고3 학생들도 잠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조는 경우가 많다. 거기다 요즘 수업하는 단원이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문법 부분이다 보니 학생들은 수업도 시작하기 전에 괴로워한다. 이럴 때 억지로 수업을 한다고 해서 학생들 머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졸고 있는 학생 두셋을 불러내 전날 수업한 내용이나 그날 수업할 내용에 대한 받아쓰기 시합을 시킨다. 구경하는 학생들에게는 흥미를 주기 위해 누가 이길 것인가에 베팅을 하도록 하고 결과를 맞힌 학생들에게는 유통기한 한 시간짜리의 일명 '쉴드권'이라는 것을 부여한다.(남학생들은 '쉴드권'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곧바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안다.) 그게 걸려 있어서인지 나온 학생들이 칠판에 받아쓰기할 때마다 교실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내 발음이 형편없으니까 너희들은 알아서 바로 적어라.

1번, (설거지/설겆이)하고 (뒤쪽/뒷쪽)도 닦아라.

2번, (납작/납짝) 엎드려 (쓱싹 뚝딱/쓱삭 뚝닥).

3번, (아랫집/아래집) 남자, (위층/윗층) 아줌마

4번, (생각건대/생각컨대) 예를 (듦/듬)이 옳다.

5번, 어, 여친이 (바뀌었네/바꼈네)."

"샘, 문장들이 왜 그래요?"

"교과서에 나오는 문장보다는 쓰일 가능성이 많아. 다음…."

학생들은 평상시에 아무 어려움 없이 사용했던 말인데도 막상 받아쓰기로 정확하게 쓰라고 하니 헷갈리기 시작한다. 주로 ( ) 안에 있는 내용이 헷갈려야 하는데 어떤 학생은 '닦아라'를 '닭아라'로, '엎드려'를'업드려'로 쓰는 것과 같은 어이없는 실수를 해서 보는 학생들에게 큰 웃음을 주기도 한다. 고3 학생들의 받아쓰기 점수는 생각보다 높지 않고, 구경하는 학생들도 답을 잘 모르기 때문에, 승부의 향방은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채점하면서 왜 그런지에 대해 설명할 때 학생들의 수업 몰입도는 최고조가 된다.

"맞춤법은 원래 이 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밝혀서 적어주는 것이 원칙이야. 그게 한글맞춤법 제1항에 있는 '어법에 맞도록' 한다는 것이지. 그게 아니면 소리대로 적어준다는 것이야. 현재 '설겆다'라는 말이 없으니 '설거지'로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게 맞겠지?"

"'아래+집'이면 [아래찝]으로 '집'이 '찝'으로 소리 나니까 사이시옷 규정을 적용해서 '아랫집'으로 표기하는 게 맞겠지? 그런데 '뒤+쪽'하고 '위+층'은 '쪽', '층'의 음이 그대로네. 그러니까 '뒤쪽, 위층'이 맞는 거야."

"지난 시간에 ㄱ, ㅂ 뒤에서 된소리로 나는 것은 같거나 비슷한 음절이 겹쳐나는 경우가 아니면 된소리로 적지 않는다고 했지? 그러니까 [납짝]으로 소리 난다고 해도 '납작'으로 적는 거야. 그런데 '쓱싹 뚝딱'은? 바로 '같거나 비슷한 음절이 겹쳐나는 경우'에 해당하니까 그냥 된소리 그대로 적는 거야."

"안울림소리 뒤에서는 '하'가 통째로 사라져. 그러니까 '생각하건대'는 안울림소리 ㄱ 뒤에서 '하'가 통째로 사라지는 거니까 '생각건대'가 되지. 왜 '원컨대'가 되고, '섭섭지 않게'가 되는지 알겠지?"

"말을 줄일 때 함부로 버리는 게 아니야. 모양이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어간이 ㄹ로 끝나는 말의 명사형은 '듦'으로 하지. 그리고 '바뀌었다'의 준말은 발음은 할 수 있지만 안 쓰는 문자 조합이기 때문에 '바뀌었다'로 그대로 둬. 지면이 다 되었으니 다음 시간에 계속해야 하겠구나."

능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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