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비토크라시

2000년대 초 독일은 저성장'고실업에 허덕이는 '유럽의 병자'였다. 2.3~2.4%를 유지하던 경제 성장률이 1990년대에는 1.9%로 떨어졌고 급기야 2000년부터는 1.0%로 추락했다. 복지는 범람했고 경직된 노동시장과 높은 조세부담으로 경제가 기진맥진하면서 사회갈등도 심각했다. 실업률은 무려 11.3%까지 치솟았다.

그러던 독일이 불과 10여 년 만에 '유럽의 우등생'으로 극적으로 변신했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유럽의 돈줄'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독일의 상승곡선은 가팔랐다. 전문가들은 그 실마리를 2003년에 시작한 '어젠다 2010'에서 찾는다. 이 어젠다는 사민당 슈뢰더 총리가 주도한 복지'노동'재정 개혁이다.

개혁을 가능케 한 핵심 요인은 사회적 합의였다. 심각성을 깨달은 이해 당사자들이 서로 조율하고 조금씩 양보한 것이다. 정부의 일방적 교통정리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타협하고 나누는 거버넌스(Governance)의 힘이었다. 추락을 거듭하던 고용률은 2005년부터 급반전해 실업률이 5.9%로 낮아졌다.

독일은 참여정부와 이명박'박근혜정부를 관통하는 화두였다. 하지만 역대 정부 모두 화려한 변신에만 눈길을 줄뿐 그 교훈을 조금도 얻지 못했다. '비토크라시'(vetocracy)에 발목이 잡혀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가 2013년 "비토크라시가 미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는 기고에 처음 등장한 이 용어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정치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입법과 정책이 좌절되는 현상을 두고 하는 말로 '거부 민주주의'다.

재정과 노동, 금융개혁은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하지만 공무원연금 개혁을 둘러싼 여야 대립 때문에 모든 개혁이 실종 상태다. 개혁에 무관심한 여당 목줄을 쥔 야당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도 모자라 이번엔 '법인세 인상 연계'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강기정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의장은 15일 "공무원연금 통과와 법인세 인상으로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윽박질렀다. 미끼에 또 미끼를 매단 꼴이다.

견제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견제를 위한 견제 또한 합의 민주주의의 걸림돌이다. 입으로는 거버넌스를 내뱉지만 비토크라시에 사로잡힌 게 지금의 야당이다. 추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면 결과는 편중에 그치지 않는다. 저울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법이다. 그 날벼락이 정치판을 넘어 모든 국민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거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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