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수능시험에 맞춤법을 묻는 6줄짜리 문제가 나왔을 때, 맞춤법 묻는 문제는 수능에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을 했던 수능 고수라 불리는 선생님들은 요즘 말로 멘붕에 빠졌었다. 수능은 사고력을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타당한 해석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는데,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교육과정의 성취 기준을 중심으로 출제하는 새로운 수능의 특성상 문법에 대해서는 교과서의 지식을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도 있기 때문에 평가원에 완전히 배신당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작년에 출제된 '엇저녁에는', '적쟎은 사람들', '회의에 부치기로', '깍뚜기', '넙적하게 생긴'은 다시 보아도 답이 알쏭달쏭하다. 아마 이 문제를 가지고 받아쓰기를 하면 고3이나 초등학생이나 비슷할 것 같다.
먼저 '엇저녁'을 보면 '어제저녁'의 준말이기 때문에 '엊저녁'이 맞춤법에 맞는 것이다. 준말이 될 때는 원래의 형태를 살려 주어야 하므로 '어제'가 '엊'으로 줄어든 것을 생각하면 쉽게 맞힐 수 있는 것이다.('엇'은 '엇박자'에 사용되는 것처럼 '어긋난'의 의미를 가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칙을 적용하면 '적쟎은'이라는 말이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냥 직관적으로 보면 글자의 모양이 이상해서 '적잖은'으로 써야 할 것 같은데, '적지 않은'의 준말임을 생각해 보면 '적쟎은'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맞춤법 규정 중 준말에 대한 규정인 36항과 39항에 나와 있는데, '적잖다'라는 말이 하나의 단어로 이미 굳어져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굳이 '적지 않다'라는 원래의 형태를 밝혀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의 단어로 굳어진 것이냐에 대한 판단은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면 사전을 검색해 보지 않고는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글맞춤법이 어려운 것이다.
'부치다'는 '붙이다'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많이 헷갈리고 많이 틀리는 단어다. 가장 쉬운 설명으로는 '붙이다'는 '붙다'의 사동사로 접착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 쓰고, 나머지는 '부치다'를 쓴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경호원을 붙이다', '공부에 흥미를 붙이다', '조건을 붙이다'와 같은 추상적 차원의 말은 판단이 애매해져서 도로 헷갈리기 시작한다. 결국 '힘에 부치다', '전을 부치다'(전을 얼굴에 팩으로 사용한다면 '붙이다'가 될 것이다), '소작을 부치다', '편지를 부치다', '비밀에 부치다', '부채로 부치다'와 같이 '부치다'를 쓰는 말을 다 알아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이 문제에서 정답은 '회의에 부치다'이다) '깍뚜기'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야기한 바가 있기 때문에 생략을 한다.(정답은 '깍두기'이다)
'넙적하다'의 경우는 학생들이 정답만큼 많이 선택한 답지이다. 'ㄱ, ㅂ' 뒤에서 나는 된소리는 '깍두기'의 예처럼 된소리로 적지 않는다는 규정을 생각해서 '넙쩍하다'로 적지 않고 '넙적하다'로 적었으니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좀 더 깊이 생각하는 학생들은 이 말이 '넓다'에서 온 말이라는 점을 생각한다. 그래서 '넓적하다'로 적으려는데 글자 모양이 좀 이상하다. 그리고 같은 '넓다'에서 온 말이지만 '널찍하다' '널따랗다'와 같은 말은 원래의 형태를 살려서 적지 않는다. 그럼 '넓적하다'가 틀린 게 아닐까? 한글맞춤법 제21항을 보면 겹받침에서 뒤에 것이 발음되는 경우에는 그 어간의 형태를 밝히어 적고, 앞에 것만 발음되는 경우에는 어간의 형태를 밝히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넓적하다' '널찍하다'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쉽게 생각했던 것들도 막상 써 보려고 하면 어려운 경우가 많다. 고3에게도 받아쓰기 수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받아쓰기 수업 후에 나는 학생들에게 꼭 덧붙인다. "확실하게 알려고 하되 안다고 해서 지적하려고 하지는 말아라."
능인고 교사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