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흔여섯 살의 영희(가명) 씨는 탈북민이다. 1998년 중국을 거쳐 2009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10년 동안 중국에서 공안에 쫓기는 불안한 생활을 이어왔고, 한국에서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더 이상 가정폭력을 견딜 수 없었던 영희 씨는 딸의 손을 잡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 딸과 전국을 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이어오던 영희 씨는 일자리를 찾아 지난해 포항으로 왔다. '쫓기고 얻어맞는' 삶에 지쳤던 영희 씨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희망 없는 일상이 이어졌지만 영희 씨는 딸을 보며 견뎠다. 그저 때리는 남편이 없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는 게 영희 씨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대부분 여성 탈북민들이 그렇듯 일자리는 식당이 전부다. '말투가 이상하다. 몸이 약하다'며 핀잔을 많이 들었지만 영희 씨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삶에 희망이 생겼다. 포항주찬양교회 이사랑 목사 덕분이다. 영희 씨는 친언니처럼 이 목사를 따른다. 이 목사도 그녀를 친동생처럼 보살피며, 좋은 인연도 소개했다. 지금 그녀는 화물운송을 하는 남편을 따라다닌다. 몸이 좋지 않은 남편이 행여나 먼 운전길에 탈이 날까 걱정해서다. 남편도 아내와 딸을 끔찍이 여긴다. 무뚝뚝하지만 아내와 딸에게는 언제나 웃어주는 남편이다. "북한 음식도 잘 먹고, 내가 해주는 건 뭐든 좋아한다"며 남편을 자랑하는 영희 씨.
요즘 영희 씨는 교회에 나가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는 데 힘을 보탠다. 이 목사가 탈북민을 돕는 행사를 열 때면 득달같이 달려와 팔을 걷어붙인다. '영희 씨 표' 북한 음식, 특히 '두부밥'의 인기는 대단하다. 영희 씨가 만든 음식을 팔아 생긴 수익금은 전액 암 투병 등 어려운 환경에 처한 동료 탈북민을 위해 쓰인다. 영희 씨는 이 일을 하고부터 무척 밝아졌다. 자신의 작은 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영희 씨는 포항에 와서 '마음 부자'가 됐다고 했다. 따뜻한 가정도 꾸렸고, 봉사활동을 하며 보람도 찾았고, 무엇보다 자신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이들을 막아줄 든든한 보디가드(포항남부서 보안계)도 생겨서 '행복하다'고 했다. 영희 씨는 "46년 만에 '행복'이라는 말을 처음 입에 담아봤다"며"포항에 있는 모든 탈북민들에게 행복 바이러스가 전파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영희 씨는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행여 불이익이 생길까 봐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지 못하는 사정을 이해해달라"며 "한국에서 행복한 가정 꾸리며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포항 박승혁 기자 ps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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