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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하견다정도(霞見多情圖)

묵연 우수전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화가는 아니다. 그의 중국 화풍 수묵 담채화 '하견다정도'(霞見多情圖, 2010년 작, 개인 소장)도 매한가지다. 산둥성 웨이하이에 머물 때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에는 이역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향수가 진하게 묻어나 있다. 우연히 영인본을 소장하게 된 이래, 나는 틈나는 대로 예의 그림과 마주한다. 살아있는 것은 죽음 곁에 살고, 죽은 것은 산 곁을 기웃하기 마련이다. 물은 불을 제 몸에 넣어 몸부림치고, 불은 물을 빨아들여 심연을 고뇌하는 듯한 이 작품은, 온갖 물이 어떻게 노을빛과 바다에서 만나 멋진 앙상블을 이루는지 잘 보여준, 더없이 황홀한 느낌의 분위기다. 천지간은 나와 한 뿌리고, 만물은 나와 한몸이다. 그렇다면 바다는 필경 만법의 어머니인 터. 만법은 하나로 돌아오고, 하나는 다시 만법을 먹여 살린다. 말 그대로 '화중유시'(畵中有詩)가 아닐 수 없다.

그림 속에는 노을을 바라보는 두 정인(情人)의 다정함이 있다. 여기에는 서구 인상주의가 가져다줄 수 없는 수묵만의 정취가 깊이 배어 있다. 붓놀림은 끝났지만 화의(畵意)는 다함이 없다. 물이랑 사이 번지는 연노랑과 분홍 노을이 들려주는 소곤거림은 화폭 속 두 연인이 바라보는 수평선 끝의 그리움과 맞닿아 절묘하게 처리되어 있다. 파리 마르모땅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모네의 그림 '인상, 떠오르는 태양'(1872)의 경우 풍경이 자아내는 감각의 측면이 도드라져 있다면, 묵연의 그림에는 우주의 무의식과 바다 물속에 스며든 황금빛 현란함이 드러나 있다. 농묵과 분홍의 신비감은 또 어떤가. 놀 빛은 물의 전신(全身)을 비추고는 수줍어한다. 그림 속 다정한 두 연인처럼 물결은 이만치 비켜선 바위들의 곡선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오선지 위의 춤추는 선율로 살아 있다.

하견다정도를 읽는 묘미는 역시 두 연인에게 집중된다. 화면 오른쪽 바위 색의 농묵이 짙게 처리되어 수평선 뒤쪽에서 은근히 몰려드는 어둠을 암시한다면, 파도의 물이랑 기법은 일품이다. 여인은 왼쪽 팔로 남자의 노란 스웨터 허리둘레를 가만히 감고 있다. 분홍 원피스를 입은 여인과 남자 사이에 보일락 말락 한 틈이 있다. 화가의 의도일까, 무의식적인 손놀림일까? 바로 이 부분에 화가의 재기가 엿보인다. 여인의 분홍 원피스 필선을 따라가다 보면, 해풍에 오른쪽으로 옷선이 날린다. 부끄러움이 가득 묻어난 여인의 속 사랑이 '틈'의 미학으로 처리되어 있다.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은 기본적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오브제에 있다. 아니, 그것의 유기적 관계 속에 있다. 작품이 일정한 예술적 원리와 질서를 지니고 있을 때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저녁놀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엔 말로 다하기 어려운 현묘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묵연은 '하견'(霞見)의 화가이다. 그는 언젠가 난새(鸞鳥)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서생(書生)은 그 답을 알고 있다.

김동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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