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이 서울 변두리 단란주점 마담이며 살인자의 여자로서 형사 사이에서 흔들리는 팜므파탈을 연기한다. '집으로 가는 길'(2013)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데, 과연 믿고 보는 배우다. 생활에 지쳐버린 텅 빈 눈동자, 아픔을 꾹꾹 누른 채 앙다문 입술, 그래도 남아있는 정념으로 흔들리는 여인을 연기한다.
40대에 들어선 여배우가 여전한 미모와 작품 해석력으로 멜로의 주인공이자 치명적인 매력의 팜므파탈을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전도연의 영화이다. 그리고 얼마 전 막을 내린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되었다. 수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칸 레드카펫에 선 전도연을 보면서 그녀가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계영화계가 관심을 보일 정도의 무게감 있는 배우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점이 뿌듯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오승욱 감독은 2000년 누아르 액션 '킬리만자로'로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15년 동안 차기작을 내놓지 않았다. '초록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등 수작의 각본 작가로 알려져 있고, 액션영화, 누아르 영화 전문가로서 영화평을 기고하며 강연가로서 꽤나 유명하지만 정작 감독 타이틀을 건 자신의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팬과 영화 전문가들은 오승욱의 두 번째 영화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영화는 오승욱이 가장 익숙하게 여기고 동시에 장기로 생각하는 '하드보일드 멜로'이며, 김남길, 박성웅, 곽도원 등 거칠고 강한 남성성을 선보였던 연기자들을 캐스팅했다. '하드보일드'란 대공황 직후인 1930년대 미국에서 성행한 소설 양식이다. 냉혹하고 비정한 현실을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간결한 문체로 표현하는 소설의 특징이 영화에 스며든 것은 전쟁의 암운이 드리워진 1940년대 무렵이다. '필름누아르'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이 장르는 도덕적 판단을 거부하는 냉철한 시각으로 폭력적인 사건을 묘사하며, 불필요한 수사를 제거하며 신속하고 거친 스타일로 사건을 그려나간다. 주로 범죄영화와 탐정영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무뢰한'은 한국의 토양 위에 새롭게 창조된 하드보일드 형사범죄물이다. 누구에게도 소속되거나 의지하지 않는 사람, 선과 악의 개념 없이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는 비도덕적인 무뢰한들이 주인공이다. 살인자의 여자 전도연과 정체를 숨긴 형사 김남길, 두 사람이 범죄를 덮거나 파헤치다가 난데없이 남녀 사이에 묘하게 피어오르는 감정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게 되고 비극에 휩싸이는 정념의 멜로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선 어떤 수단이든 다 쓰는 형사 정재곤(김남길)은 살인을 하고 잠적한 박준길(박성웅)을 쫓는다. 그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는 박준길의 애인 김혜경(전도연)이다. 재곤은 정체를 숨긴 채 혜경의 단란주점 영업부장으로 취업한다. 준길을 잡기 위해 혜경의 곁에 머무르는 사이에 재곤은 퇴폐적이고 강렬한 술집 마담이라는 가면 아래 자리한 혜경의 외로움과 아픔을 본다. 범인을 잡겠다는 목표의식에 중독되어 있던 재곤은 자신의 감정을 어렴풋이 느끼며 흔들리고, 혜경 역시 늘 자기 옆에 있어주는 재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영화는 사건의 진행보다는 주인공들의 감정의 결을 그려나간다. 한국에서 하드보일드 멜로는 쉽지 않은 장르다. 분위기를 노리는 장르란 사건의 폭발력을 중심에 놓는 오락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각을 잡고 한껏 멋을 부려보지만 목표는 흐지부지 되고 사건은 미궁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영화가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전개야말로 우리 모두가 실존적으로 처한 현실이기에 매우 사실적으로 가슴을 울릴 수 있다. '무뢰한'이 펼쳐보이는 '사랑의 민얼굴'은 매끄러운 화면과 화려한 미술, 기교 있는 편집을 배제하고 그저 거칠고 투박한 감정의 원형에 집착한다. 여백 있는 스타일 가운데 밑바닥 사랑이 솟아오른다.
영화적 시도는 충분히 설득력 있고 하드보일드의 멋을 한국적으로 적용하려는 노력은 빛나지만 이 모든 것이 관객들의 가슴으로 쏙 들어가서 박힐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한국형 하드보일드를 향한 경주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 어느 영화장르보다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정민아/영화평론가·용인대 영화영상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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