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착같이 벌어서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귀감'.
김윤철(74) 관악문화원장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달성군 유곡의 산골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김 원장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 문턱을 넘기 어려웠다. 장남 공부도 겨우 시키던 터라 차남인 그에겐 등록금 없는 신설 중학교가 마지막 학창시절이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 취직을 위해 대구, 부산으로 가출을 감행하며 삶의 탈출구에 안간힘을 쏟았다. 결국 논 반 마지기 판 돈을 움켜쥐고 서울로 온 그는 이를 악 다물고 일했다. 번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악착같이 땅을 그러모아 30대 중반에 거부의 자리에 앉았다.
그는 단지 돈 많은 부자가 아니다. '50부터 봉사의 삶'을 기치로 내건 그의 철학은 관악구에서 돈 잘 쓰는, 제대로 쓰는 부자로 자리매김했다.
30여 년간 다른 이에게 부탁 한 번 하지 않고 베푸는 삶을 실천해왔기에 '맑고 곧게 살자'는 뜻을 담은 청담(靑潭)이란 호도 얻었다.
김 원장은 "자식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하지 않는다"며 "내가 항상 바르게 성실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교육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땅 반 마지기 팔아 서울로
부모님은 차남인 그에게 고향에서 농사일을 도와주길 바랐다. 하지만 장래가 뻔한 시골을 벗어나 어떻게든 도시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중학교 졸업 뒤 부모님 몰래 쌀까지 판 돈으로 대구, 부산으로 갔지만 가진 돈을 몽땅 사기당하고 결국 1주일 만에 거지꼴로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결국 서울에 사는 외사촌 형에게 7번의 편지 끝에 '약간의 돈을 들고 올라오라'는 답장을 받았다. 부모님은 가출까지 해가며 도시로 나가려는 그를 애틋하게 여겨 결국 목숨 같은 논 한 마지기를 팔아 절반으로 소 1마리를 사고, 나머지 돈을 그의 객지생활비로 손에 쥐여줬다.
◆약 팔러 종로3가에서 영등포까지
논 판 돈을 들고 서울로 간 김 원장은 종로3가의 약품 도매상에 들어갔다. 자전거로 약품을 실어 영등포까지 배달하고, 저녁에는 다시 주문을 받고 수금하는 일을 쉼 없이 반복했다. 1년간의 경험 뒤 조금 모은 돈으로 대구로 와 약국을 차렸다. 하지만 관리약사를 둔 어설픈 운영이 잘 될 리 없었다. 6개월 만에 다시 서울로 갔고, 평소 성실함을 눈여겨봤던 약품 도매상 사장은 그를 다시 받아들였다. 2년간 게으름피우지 않고 일했지만, 과장'부장'상무의 책상 위에는 담배꽁초만 쌓여갔다. 얇은 월급봉투와 두꺼운 담배꽁초 더미는 그에게 '비전 없음'을 말했고, 결국 독립해 오퍼상의 길로 나섰다.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약품 판매를 하면서 돈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가 모은 돈은 고스란히 고향 땅을 사는데 들어갔다.
그는 "부모님이 자식보다 귀하게 여긴 논을 팔아줬기 때문에 나도 돈 버는 대로 시골 논을 사 드렸다"고 말했다.
그가 산 논은 2년 만에 11마지기(2천200평)가 됐다. 고향 유곡리는 물론 유가면까지 소문이 퍼졌다. '김 씨네 둘째아들이 서울 가서 성공해 고향 땅을 수천 평이나 샀다더라'는 거였다. 그의 성공 소식을 들은 고향 친구 몇 명은 앞다퉈 상경하기도 했다.
◆약국경영 속여 결혼
1961년 5'16 이후 사회 질서가 엄격해지면서 약품 직거래는 물론 밀수품이나 군대에서 유출된 약품도 취급하지 못하면서 1년여 뒤 장사를 그만둬야 했다. 안정적 생활을 위해 결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맘때였다. 집안을 통해 선을 본 처자가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방 한 칸짜리 총각은 난감했다. 그동안 상당히 모았던 돈은 모두 시골 땅 사는 데 쓰고 빈털터리였기 때문이다.
집에서 재봉틀로 옷 만드는 어머니의 일을 돕던 고운 처녀를 얻기 위해 '서울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자수성가한 총각'이라고 속일 수밖에 없었다.
결혼 첫날 저녁부터 근심 걱정이 태산 같았다. 결국 하루 만에 전후 사정이 들통 났지만, 아내는 의연하게 대처했다. 당시 노량진에 살던 그는 아내의 경험을 살려 시장 안에서 자그마한 옷가게를 얻기로 했다.
◆대박 난 노량진 옷가게
4평짜리 빈 점포였지만, 워낙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돈이 꽤 모이기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점포 정리를 하고 문을 연 뒤 평화시장에서 물건을 떼 올 때쯤에야 다른 가게가 문을 열기 시작했다. 수년 동안 '죽기 살기로' 성실하게 일한 끝에 목돈이 쌓였다.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영등포구(현 관악구) 쪽에 논밭을 50평, 100평씩 사들였다. 나이 서른에 집을 마련할 목표를 세웠으나, 스물아홉에 그럴듯한 집을 장만했고 서른에는 평생 살 기반을 잡았다. 옷 장사 7년 만에 점포 주인이 군 제대한 아들에게 넘겨줄 요량으로 '가게 인수'를 제안했고, 마침 싫증이 나던 차에 웃돈을 받고 넘겼다.
◆땅에 대한 집착, 평생 재산 모아
그는 옷가게를 넘기고 받은 돈으로 역시 관악구의 고구마 밭을 비롯해 논밭 658평을 사들였다. 옷가게를 해서 번 돈과 옷가게를 판 돈으로 몽땅 사들인 땅은 그동안 엄청난 지가상승을 거듭해 김 원장의 평생 자산이 됐다. 그는 엄청난 땅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함이 몸에 밴 터라 고구마 밭 매는 정도의 일로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결국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노량진 시장에 다시 옷가게를 열었지만, 얼마 뒤 점포에 불이 나면서 이마저 접어야 했다.
이제 그에게는 땅밖에 없었고, 노는 땅을 이용해 집을 지어 팔거나 세를 놓았다. 하지만 건축을 해서 버는 돈보다 지가상승으로 버는 돈이 훨씬 많은 상황이었다.
1970년대 중반 평생 가져갈 돈을 번 그는 '50까지만 돈을 벌고, 이후부터는 사회에 봉사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여생의 필업, 고향 후학을 위한 기숙사 건립
자식들도 잘 키운 그는 이제 여한이 없다. 여생 동안 꼭 이뤄놓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면 고향 후학들을 위해 '달성학사'를 건립하는 일이다. 하지만 엄청난 비용과 고향 독지가들의 호응 여부가 관건이다.
김 원장은 "달성학사 건립은 고향 출신 독지가들이 십시일반 모으고, 지방자치단체와 군민들이 뜻을 모아야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사 건립에 대한 호응과 고향 사람들의 의지가 모인다면 나눔의 삶을 위한 또 하나의 '큰 결심'을 할 태세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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