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뢰(味蕾)/ 김은주 지음/학이사 펴냄.
'얼추 봄꽃이 지고 막 숲이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보리누름 즈음이 낙동강 웅어(熊漁)가 한창일 때다. 누룩 사러 고개 넘어 창녕장에 오니 시절 인연이 닿았는지 귀한 웅어를 만났다.
(웅어 파는 할머니는) 큰 고무통에 도마를 걸치고 손은 부지런히 웅어를 썰며 앞에 앉은 나를 쳐다본다. 눈은 이미 도마를 떠났는데도 칼질은 여전히 맞춤하게 움직인다. 착착 칼 너머 국수 가닥 같은 웅어가 쌓인다.
할머니 칼끝에는 짭짤한 간기가 숨어 있다. 칼끝에서 무슨 양념이 나오는지 전어도 우럭도 할머니가 썰면 그 맛이 다르다. 고기의 두께와 써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이 나기 때문이다. 도톰하게 썰어야 제 맛인 회도 있지만 뼈째 먹는 웅어는 가로로 놓인 뼈를 살짝 비틀어 써는 재주가 있어야 씹는 내내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뼛속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미뢰-중에서.
중견 수필가 김은주 씨가 세 번째 수필집을 냈다. 음식과 식재료를 소재로 펴낸 수필집 '미뢰'(味蕾)다. 작가는 자연요리연구가이다. 시골 작은 작업실에서 사계절 제철에 나는 식재료로 새로운 음식을 연구한다. 음식을 통해 세상을 보고, 음식을 통해 소통한다.
작가는 먹는 일은 뭇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먹이는 일은 뭇사람을 섬기는 일이라 여긴다. 그가 산속에서 모셔온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일이나, 그 음식으로 누군가를 거두는 일은 모두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철 따라 자연이 주는 경험을 스승 삼아, 노동으로 익힌 언어로 자신만의 글을 써내려간다. 그리하여 꽃 피면 산에 올라가 재료를 장만하고, 눈보라 치면 수제 강정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눈다. 자연과 재료, 사람과 사랑을 조화롭게 버무려 음식을 만들고, 글을 쓰는 것이다. 음식은 곧 글이고, 글이 곧 음식인 셈이다.
'추워서 그런지 엿물이 더 딱딱해졌다. 잘못하다 엿물에 푹 담긴 가는 국자를 부숴 먹을 수도 있겠다 싶어 뜨거운 물에 엿 통을 담그고 살살 달랜다. 엿 통 아래를 더운물로 씻어주며 통 안을 살핀다. 뭐든 꽉 물고 다시는 놓지 않을 기세더니 그새 수양버들 가지처럼 부드러워졌다. 좀 말랑해졌다 하여 만만히 볼 일도 아니다. 감기고, 끈적거리고, 다시 달라붙으면서 온도와 습도, 다시 바람에 의해 하루에도 수십 번 요사(妖邪)를 부리니 엿의 심사를 도통 알 길이 없다. 스무 살 가시내의 바람 든 속처럼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니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엿 다루기가 쉽지 않다.'-청(궁중에서 꿀, 조청, 엿을 이르던 말)을 잡다-중에서.
'마량과 그리 멀지 않은 강진에 가면 Y라는 절이 있다. 절 뒤에는 야생 유자 밭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법당문을 열면 남해가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있다. 사철 내내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라는 유자는 그 맛과 향이 유별나다. 남해의 햇살과 바람에 저절로 영근 유자는 도시의 미끈한 유자와 그 맛이 사뭇 다르다.
(농장에서 재배한 유자는) 썰어보면 육즙도 풍부하고 껍질도 한결 보드랍다. 하지만, 바닷바람과 따가운 햇살을 견디며 자란 강진의 유자와 비길 바가 아니다. 제 몸에 가시가 있는 유자나무는 비바람 속에서 흔들리다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기도 한다. 그 상처들이 아물며 몸 안에 묘한 향기를 품는가 보다.'-유자-중에서
지은이는 "어릴 때 엄마가 산과 들에서 따온 재료로 만들어 주시던 음식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잊고 지냈는데 세월이 가고 엄마 나이쯤 되니 저절로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다"고 말한다. 딱히 요리전문가가 되어야겠다고 작정한 바 없었는데 여기까지 왔다는 말이었다.
그는 제철에 나는 꽃이나 푸성귀를 갈무리해 뒀다가 겨울에 본격적으로 음식을 만든다. 그래서 봄, 여름, 가을에는 산과 들을 다니며 제철 식재료 갈무리에 여념이 없다. 남들은 한 번도 당선이 어려운 신춘문예에 두 번이나 당선됐고(부산일보와 전북일보), 이미 2권의 수필집을 냈지만 요즘은 글보다 음식이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고 말한다.
224쪽, 1만2천원.
※ 미뢰(味蕾): 맛을 느끼는 꽃봉오리 모양의 혀 기관.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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