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을 가다가-송익필
갈 때는 쉬는 걸 잊고 쉴 땐 가는 것을 잊어
솔 그늘에 말 쉬게 하고 물소리를 듣고 있네
뒤에 오던 몇 사람이 날 앞질러 갔나 몰라
제 나름 제 갈 길 가는데 또 무엇을 다툴 건가
山行忘坐坐忘行(산행망좌좌망행)
歇馬松陰聽水聲(헐마송음청수성)
後我幾人先我去(후아기인선아거)
各歸其止又何爭(각귀기지우하쟁)
[산행(山行)]
*其止(기지): 그 목적지.
김원각 시인의 시조 '달팽이의 생각'이란 작품으로부터 서술의 실마리를 풀어보자. '다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 둘 밖에 안보여/ 뒤에 가던 달팽이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걱정 마 그것들 모두/ 지구 안에 있을 거야.' 그렇다. 벼룩이 아무리 힘껏 뛰어 봐야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 우리가 아무리 빨리 달려 봐도 결국은 이 좁은 지구 안에 있다. 남이 뛴다 해서 덩달아 뛰지 말고, 천천히 가기 시합이나 하며 살자. 아니면 시합 같은 거, 아예 하지 말고 살고….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의 시 '산행'의 화자가 산길을 걸어가는 방식도 위의 달팽이를 꼭 빼닮았다. 갈 때는 가는 것이 너무나도 좋아 '쉰다'는 개념을 잊어버린다. 쉴 때는 쉬는 것이 너무나도 좋아 '간다'는 개념을 잊어버린다. 지금 그는 소나무 그늘 아래 말과 함께 쉬면서 하염없이 물소리를 듣고 있는 중이다. 산의 호흡을 함께 호흡하며, 산의 품속에다 내 몸을 내맡긴다.
그 사이 뒤에서 처져오던 사람들이 여럿 나를 앞질러 지나간다. 그 가운데는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듯 후다닥 뛰어가는 사람도 있다. 최단 시간 정상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산에 오르는 목적이 이처럼 사람마다 다르므로 그 행동 방식도 같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뒤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추월해 간다고 해서 내가 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이긴 것도 물론 아니다. 각각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 신경을 쓸 필요 자체가 없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반칠환 시인의 시 '새해 첫 기적'이다. 앞서가는 사람에게 주눅 들지 말고, 뒤처졌다고 조바심 내지 말 것. 각각 자기에게 맞는 삶을 살다 보면, 우리 모두가 한날한시에 각각 다른 향기가 나는 '행복한 나라'에 도착해 있을 게다.
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