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쐬주'의 항변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카~~),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한국 리얼리즘 가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명태'는 바리톤 오현명의 굵직한 목소리로 들어야 제격이다. 6'25전쟁 때 대구에서 피란생활을 한 어느 시인의 노랫말에 곡을 붙인 시대적인 배경도 그렇고, 가사에 등장하는 소재들 또한 소프라노나 테너보다는 바리톤의 음역에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울퉁불퉁한 서민의 삶을 대변하는 명태 안주에다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소주' 아닌 '쐬주'까지 마시고 있으니, 이 노래는 한국적인 익살과 한숨 섞인 자조 그리고 승화된 정한을 오롯이 담고 있는 듯하다. 인생살이의 쓴맛깨나 본 중년 신사가 해 질 녘 선술집에 앉아 컬컬한 목구멍으로 넘기는 소주 맛 같다고나 할까. 지난날의 소주는 노랫말 속의 가난한 시인처럼 마시고 나서 '카~~!' 소리가 나야 제 맛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소주의 저도수 경쟁이 벌어지면서 20도 이하로 떨어진데다, 14도짜리 소주까지 나왔다. 술을 즐기는 성별과 연령층이 다양해지면서 순한 소주가 인기를 누리는 것이다.

소주의 저변 확대와 함께 지역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화로 소주의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대구경북의 '참소주', 수도권의 '참이슬', 부산의 '좋은데이', 강원도의 '처음처럼', 전남의 '잎새주', 충북의 '시원한 청풍', 충남의 'O2 린', 제주의 '한라산' 등이 지역의 맹주 자리를 다투는 형국이다.

게다가 이제는 유자와 자몽 등 천연 과실 원액과 레몬 글라스 등 허브 엑기스를 첨가한 소주까지 출시되고 있다. 여성과 젊은 층을 겨냥해 과일 향과 새콤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소주 맛은 소주다워야 한다'라는 아날로그 세대로서는 한두 병을 마셔도 민숭민숭한 소주 맛에 '이게 무슨 소주냐'고 항변할 만도 하다.

소주는 어떤 사람과 무슨 안주를 두고 마시느냐에 따라 또 맛과 멋이 달라졌다. 애주가들로서는 노릇노릇 구운 삼겹살에 쐬주 한 잔을 마다할 리 없고, 문어숙회나 생선회라도 한 접시 나오는 날에는 젓가락 장단에 옛노래 한 곡조는 흥얼거릴만했다. 요즘 나온 과일 맛 소주라면 치킨이나 피자 안주가 제격이 아닐까. 세월호에 멍들고 메르스로 타는 가슴에 소주 한 잔인들 너끈하게 나눌 수 없는 수상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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