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한여름의 판타지아

진하지 않아 담백한 국 한 그릇처럼 맑아서 깊은 맛

특별한 형식의 영화다. 대기업 주도의 주류영화 제작 환경, 관객과 만나기까지 좁은 문을 뚫어야 하는 치열한 경쟁 상황의 독립영화계 현실에서, 한국영화는 분명한 서사와 결말을 가진 장르영화 중심으로 제작되고 있다. 하나의 매끈한 상품으로 극적 재미와 볼거리는 풍부하되 자유분방한 멋은 아쉽기만 하다. 인위적으로 꽉 짜인 구조로 이루어진 영화들은 몰입도를 높이며 재미를 추구한다. 반면에 그런 꼭 죄는 긴장감에 식상해진 관객은 어느 정도 느슨하더라도 스크린 속에 현실과 일상을 대입하며 삶의 또 다른 면을 찾곤 한다. 그럴 때 일상에 좀 더 밀접하게 다가서는 영화를 보며 더 큰 재미를 느낀다.

장편 데뷔작 '회오리바람'(2009)으로 밴쿠버영화제 용호상을 수상하며 예술영화계에 등장한 장건재 감독의 신작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서두에서 언급한, 뭔가 다른 영화 보기를 추동하는 작품이다. 재료의 맛을 충분히 내기 위해 심심하게 간을 해서 깊은 맛을 우려내는 한 그릇 맑은 국처럼 정갈하다. 영화 속 여행처럼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예쁜 꿈을 꾼 듯하다.

영화는 흑백으로 촬영된 1부와 컬러로 촬영된 2부로 나뉜다. 서로 다른 인물과 다른 이야기이지만, 1부에 나오는 여성과 남성이 2부에 다른 인물이 되어 다른 이야기를 펼친다. 1부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하고 픽션을 가미했으며, 2부는 완연한 픽션이다. 1부의 중심인물인 감독이 잠에서 깨어난 후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2부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2부는 아마도 감독의 머릿속 상상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마저도 분명치는 않다.

영화감독 김태훈은 통역을 맡은 조감독 미정과 함께 일본의 지방 소도시 고조를 찾는다. 그들은 고조시 공무원, 한때 대도시에서 영업 일을 하다 고향인 고조로 돌아온 중년 남자, 평생을 고조에서 살아온 산 할머니의 인터뷰를 한다. 공무원 유스케를 빼고 인터뷰하는 이들은 실제 인물들이다. 지금은 폐쇄된 작은 학교를 찾아가고 텅 빈 거리를 거니는 태훈이라는 존재는 관객으로 하여금 매우 오래된 한적하고 낯선 곳에 서 있도록 이끈다.

1부에서 조감독을 연기한 여자와 고조시 공무원을 연기한 남자는 2부에서 고조시를 찾은 여행객인 배우 혜정과 현지에서 우연히 만나 가이드를 하게 되는 농부 유스케로 등장한다. 두 남녀는 천천히 거리를 걷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지고, 어쩌면 로맨스 무드에 돌입하게 된다.

앞서 1부에서 고조 공무원 유스케는 태훈에게 자신의 원래 꿈은 배우였고, 한국 여자를 좋아한 적이 있다는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했다. 2부는 공무원 유스케의 과거인지, 태훈의 상상인지, 혹은 유스케의 미래인지 알 수 없다. 하나의 공간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현실과 판타지가 넘나든다. 이를 위해 영화적 장치들이 치밀하게 배치되고, 영화를 보는 동안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장치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풍부하다.

'수자쿠'(1997)로 역대 최연소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받고, '너를 보내는 숲'(2007)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명성을 높인 여성 감독 가와세 나오미의 제안으로 영화가 시작되었다. 자연주의 영상미의 대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운영하는 나라국제영화제의 제작 지원을 받았다.

사실주의에 바탕을 둔 섬세한 연출 세계를 형성한 장건재 감독의 영화적 특징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나며 빛을 발한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조합상을 받았다. 영화는 한일 합작 예술영화의 모범으로 남을 것이다. 최근 한일 양국이 정치적으로 긴장관계에 빠진 탓인지, 낯선 곳에서 만난 한국 여자와 일본 남자의 로맨스가 더욱 설레고도 안타깝다. 다르고도 닮은 두 나라 사람들, 그리고 양국 문화 교류가 낳은 성취 등 일본이라는 나라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쨌거나 담백한 촬영으로 담아낸 '고조시'는 너무도 아름답다.

영화평론가'용인대 영화영상학과 초빙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