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수성못은 지난 시절 투병의 외로움을 달래준 나의 연인이다. 넓은 못 둘레를 나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무려 5년 동안이나 산책을 했다. 흰 눈이 퍼붓는 법이산에 올라 바라본 겨울 새벽의 수성못은, 그야말로 설경 수묵화였다. 봄밤 벚꽃은 피고 환한 보름달과 네온사인 불빛이 바람에 흔들려 온갖 형상으로 물속에 일렁거릴 때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시(詩)들이 절로 흘러나왔다. 극도로 아픈 몸은, 상대적으로 눈에 보이는 만상을 꿈속처럼 만들었다. 둑 아래 물과 빛, 꽃이 한데 뒤엉켜 소곤거리는 듯한 환각을 느끼며 '만약 내가 죽어 저 광활한 우주로 돌아간다면 아름다운 은하수가 되리라'라고 나름 상상했다. 인간 삶은 어쩌면 고해(苦海)인지도 모른다. 제2시집 '구멍'을 쓸 때쯤 나는 극도의 정신분열 속에서 무의식과 의식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하여 거의 광적으로 좋아했던 화가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였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한밤중 수성못 야경을 통해 나는 고흐의 명화 '론강의 별 달밤'(1888)에서 물과 빛, 시가 하나임을 알았다. 별빛이건 달빛이건 물에 접하는 순간 황홀경(ecstasy)이 되고 만다. 고흐는 촛불을 모자 위에 세워두고 밤경치를 그렸다. 고갱과의 불화로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르기 불과 5개월 전이다. 밤하늘 별이 너무도 곱고 찬란한 것이, 오히려 고결한 비극의 전조 같다. 아니, 무한한 우주 별빛 속에서 사라진 혼령과 강물의 리듬이 혼융된, 참으로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 같다.
그런가 하면 고흐가 자살 직전에 그린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1890)도 나의 단골 감상 메뉴다. 폭풍에 휘말린 검푸른 하늘과 까마귀, 그리고 노란 보리밭은 화면 전체를 콘트라스트(contrast'대비)시키며 두렵고 불길한 것이, 마치 뭉크의 그림 '절규'를 연상하게 된다. 당시 나는 수년간 고흐의 그림에 파묻혀 지낸 나머지, 그의 혼과 하나로 이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을 보고 있을 때면, 자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 섬뜩했다.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1887)은 또 어떤가.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옮겨 간다. 해바라기 꽃은 고흐의 마지막 생의 열정이자, 내면의 불꽃을 은유한다. 그 노랑의 강렬함은 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을 앓던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색이다. 압생트라는 이름의 값싼 독주 탓으로 고흐의 시신경은 이미 손상되어 모든 것이 노랗게만 보일 따름이다. 거개의 평자들이 고흐의 해바라기에서 태양을 향한 강렬한 생명력을 읽었다면, 나는 세상 여인들의 슬픈 사타구니의 숙명을 생각한다. 그것은 태양과 남성성의 희생양이 된 여인의 슬픈 통곡이자, 자궁 속에 고인 핏물이다. 뚝, 뚝, 뚝. 핏물이 번지는 화폭 속에서 나는 인류 구원의 소리를 듣는다. 고흐의 그림, 아니 고흐의 시를 통해 듣는다.
김동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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