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에 얽힌 다리(교량) 얘기를 하나 해 보자. 1392년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자객을 보내 살해한 '정몽주'와 그 현장인 고려의 옛 수도 개경의 '선죽교'만큼 대단한 인물과 다리는 아니다. 그래도 지난 세기 나름 풍운아로 살았던 한 인물과 그의 흔적이 있는 대구의 어느 다리다. 거지왕 '김춘삼'과 대구 신천에 있는 '푸른다리'(현 신성교)다.
◆희대의 거지왕 배출한 다리
김춘삼(1928~2006)은 서울 청계천에 있는 염천교 밑에 살며 거지들의 우두머리로 지냈다. 1999년 큰 인기를 얻은 TV 드라마 '왕초'에 그 내용이 잘 나와 있다. 그런데 염천교만 언급해서는 김춘삼의 생애를 제대로 설명하고 평가할 수 없다. 김춘삼이 처음 거지 생활을 시작한 대구 신천 '푸른다리'를 반드시 얘기해야 한다.
대구 토박이 김종욱 향토사학자는 "김춘삼은 어린 시절 누나와 함께 엄마를 찾으러 다니다 한 못된 일본인에게 붙잡혀 앵벌이 노릇을 했다. 그러다 도망쳐 온 곳이 바로 푸른다리였다. 이 다리 밑 움막의 열다섯 살 난 두목 '발가락' 밑에서 졸개 노릇을 하며 지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춘삼은 인생을 바꾸는 첫 도전을 했다. 두목 발가락과 '기차놀이' 결전을 벌인 것. 기차놀이는 철로 위에 둘이 서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쉽게 말해 달려오는 기차를 먼저 피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담력 싸움이다. 이 결전에서 승리한 김춘삼은 새 두목이 된다. 본격적인 거지'왕' 인생이 바로 푸른다리 시절부터 시작된 것.
이후 청년이 된 김춘삼은 대구를 떠나 대전의 푸른다리라 할 수 있는 목척다리 밑 거지 움막까지 장악한 뒤 서울로 진출했다. 당대의 주먹이었던 시라소니, 이정재 등과 결투를 벌이며 명성을 쌓았고, 김두한의 도움으로 명실상부 거지왕에 등극했다. 그랬던 김춘삼은 말년 때까지 거지, 구두닦이, 고아 등을 돕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가 성공한 후 되돌아 본 것은 푸른다리 시절 딱한 삶을 살았던 어린 자신, 그리고 그때의 자신과 닮은 삶을 살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었다. 사실 김춘삼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또 허구인지 확인할 길이 마땅찮다. 그럼에도 김춘삼의 생애를 말할 때 대구 신천 푸른다리는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고, 그 시절 헐벗고 배고팠던 서민들의 삶도 들여다볼 수 있는 골목길 다리다.
푸른다리는 당시 다리 윗부분이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어 붙었던 이름이다. 이 다리는 원래 경부선 철교였는데, 철도가 옮겨가면서 흉물처럼 방치되다 1990년대에 '신성교'라는 이름으로 새 단장됐다. 현재 차와 사람이 함께 다닐 수 있는 2개 차로 규모 동네 다리로 활용되고 있다. 물론 다리 밑에는 이제 움막이 들어설 공간조차 없고, 다리에 푸른색 칠도 돼 있지 않다.
◆대구 최초의 육교, 여전히 그 자리에
다리는 강이 아닌 땅 위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골목길과 좀 더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바로 육교다. 앞서 '골목을 잇는 다리, 상편'에서 다룬 금호강 다리들과 마찬가지로 대구의 육교를 얘기하려 해도 대구 동구와 북구를 빼놓을 수 없다. 1973년 같은 해에 대구 최초의 육교가 각각 설치된 지역이어서다. 저마다 동네 이름을 넣은 신암육교(동구)와 대현육교(북구)다.
대구에 육교 시대가 태동한 배경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신암육교는 주민들이 자녀의 안전한 통학을 위해 진정을 넣어 횡단보도를 없애고 마련한 다리다. 물론 아이들은 등하교 때 말고도 신나게 뛰어놀려고 놀이터 삼아 육교를 찾았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다른 육교들과 마찬가지로 신암육교 이용자는 크게 줄었고 육교 자체도 낡아 주민들은 거꾸로 육교를 없애고 횡단보도를 설치해 주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현재 신암육교와 대현육교 모두 철거 여부가 꾸준히 논의에 오르고 있다. 아무튼, 동구에 가면 가장 오래된 신암육교부터 최근 봉무동 이시아폴리스 인근에 설치된 몸매 잘빠진 막내 육교까지, 대구 육교의 40여 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단, 쏘다니던 아이들의 모습은 이제 보기 힘들어졌다. 현재 대구 8개 구'군에 설치돼 쓰이고 있는 보도용 육교는 50여 개다.
◆점점 사라지는 동네 다리
금호강에 놓인 큰 다리들을 제외하면, 대구의 다리는 대부분 실개천 같은 작은 하천에 놓인 소박하고, 또 투박한 동네 다리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일제강점기 대구 신천에는 나무다리도 있었다. 그때는 신천에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건설된 다리라고는 신천교 등 몇 개뿐이었던 시절이다. 제법 교량의 형태를 갖춘 나무다리도 있었지만, 아무렇게나 놓인 나무기둥을 아슬아슬하게 건너야 하는 다리도 있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구읍성의 서쪽 정문인 달서문 바깥 달서천에 아치형 돌다리인 달서교가 있었다. 1796년 조선 정조 때 만들어진 다리다. 현재 달서천은 복개돼 있고, 달서교 역시 사라졌다. 지금 전해지는 1900년대 초 달서교 사진을 통해 동네 다리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을 보면 다리 주변에 뭔가 사고파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실은 바로 옆에 대구의 오래된 시장인 서문시장이 있어서였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다리 주변은 오래전부터 장터를 비롯해 사람들이 운집하는 만남의 거리인 경우가 많았다.
수많은 실개천이 복개 공사를 거치면서 골목과 골목을 잇던 동네 다리들도 함께 사라졌다. 그래도 금호강의 지류가 흐르는 대구의 동네 몇 곳에 가면 여전히 주민들이 마실 다니는 동네 다리를 발견할 수 있다.
글'사진 황희진 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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