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는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이요. 유학의 본향이며 유학이 뿌린 내린 곳이다. 국내에 주자 성리학을 처음 전한 성리학의 비조(鼻祖)인 민족 성인 회헌 안향(安珦'1243~1306. 9. 12)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안향은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로, 당시 국립대학격인 성균관을 건립하고 장학금제도를 만든 그 시대의 교육 혁신사상가다. 7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안향 선생의 인륜도의사상과 나라사랑, 인재를 중히 여기는 사상은 후손들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어 도도히 흐르고 있다.
매일신문은 물질문화가 정신문화를 압도하며 정신의 황폐화를 가져오는 요즘, 영주 선비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남긴 향기를 모두 6차례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안향의 생애와 사상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초명을 유(裕)라고 부르다, 향(珦)으로 개명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과 같아 이를 피하기 위해 초명인 유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 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를 추모해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본떠 지었다.
밀직부사 안부의 아들로, 흥주 죽계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고 예법을 잘 지켰다. 숙수사(현재의 소수서원 자리)란 절을 오가며 독서를 하면서 뜻을 세워 18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 교서랑으로 벼슬길을 시작했다.
안향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는 순흥면 석교리 산기슭에 있는 세연지(洗硯池)라는 연못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현재 세연지를 표시하는 비석에는 '죽계 서쪽 송학산 밑에 학교촌이 있고 바위 사이에 작은 샘이 있는데, 그 밑에는 네모진 못이 있으니 회헌 안향 선생께서 소싯적에 벼루를 씻던 못이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국내 사정은 원나라의 침범으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로, 조정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오는 문제를 놓고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원종을 중심으로 문신들은 환도를 희망했고, 삼별초 무신들은 그것은 몽골에 대한 굴복이라며 완강히 반대했다. 원종이 환도했을 때 안향은 한동안 강화도에 억류된 삶을 살았다.
난세에 학문을 진작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안향은 1288년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원의 연경에서 주자전서를 필사해 돌아온 뒤 주자학을 연구했다고 한다. 이것이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초였다.
안향은 수차례 원나라를 왕래하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기도 했다.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섬학전(장학재단 재정관리)을 설치하고 국학의 대성전을 낙성했으며, 박사 김무정을 중국에 보내 공자의 초상화와 제기, 악기, 육경, 제사자 등의 책을 구입하는 등 부단한 노력을 통해 국내 유학을 크게 일으키고 진흥시켰다.
30년에 걸친 몽골의 침공으로 민생의 고달픔이 극심하던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 정신과 불교보다 한층 더 주지적인 수양론 등의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 수용한 것이 그의 사상이다.
◆안향의 교육활동 양현고 장학재단
안향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학교 재건과 인재양성에 앞장섰다. 그가 당시 시대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 역사적 배경을 의식, 당시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여러 가지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인재를 기르는 것인데, 이제 곡식창고가 비어 있으니 선비양성의 재정적인 뒷받침을 위해 모든 벼슬아치들로 하여금 각기 은과 베를 내게 하되, 차등 있게 갹출시켜야 합니다. 이를 양현고에 돌려 원금을 세우고 그 이식을 취하여 경비로 쓰도록 함이 마땅할까 합니다."
왕은 그의 이러한 건의를 받아들여 문무백관에게 6품관 이상은 은 1근, 7품관 이하는 베를 내게 해서 이를 양현고(장학재단)에 붙여, 거기서 생기는 이자로 선비를 양성하는 재정에 충당하도록 하는 내용의 섬학전 설치안을 시행하도록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볼 때 그는 단순하고 소극적인 의미의 주자학 전래자가 아니라 주자학의 수용자인 유학자로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의 사후인 1318년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된 그의 초상화는 이것을 모사한 것으로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됐다.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에 그의 사묘를 세우고 소수서원을 만들었고, 1549년 풍기군수 퇴계 이황의 요청에 따라 명종이 친필로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소수서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인 회헌영정(국보 111호)은 소수서원의 자랑거리다. 소수서원은 회헌 안향을 제향할 목적으로 건립된 서원이다.
조선 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 지내기 위해 사묘를 세우고 그 이듬해 안향 선생을 봉안, 학사를 이건해 백운동서원이라 칭했다. 중종 39년에는 안축, 안보를 배향하고 명종 3년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명종 5년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의 시초가 됐다. 이후 인조 11년(1633년) 주세붕을 추향해 향사를 지내고 있다.
소수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강당과 그 뒤로 직방재와 일신재, 동북쪽에는 학구재, 동쪽에는 지락재가 있다. 또 서쪽에는 서고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 영정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가 안치된 문성공묘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학자이자 선비로 이름이 높은 퇴계 이황(1501~1570)은 회헌 안향을 사모했다. 두 사람은 동방 성리학의 성현이다. 고려의 안향이 최초로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들여왔다면, 그 학문은 퇴계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25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안향의 선학에 대한 퇴계의 외경심과 사랑은 소수서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수'란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의미로, 소수서원은 '학문의 중흥'이란 큰 임무를 띠고 탄생했다. 그리고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나갔다.
건물 배치의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에서 당시 학자들의 기품을 느끼게 한다. 서원 입구에는 숙수사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우뚝 서 있다. 유생의 터에 보존돼 있는 불교의 상징에서 당시 학자들의 너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모든 건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원 옆으로 낙동강의 작은 젖줄인 죽계수가 흐르고 개울 건너편 아담한 바위에는 주세붕이 직접 쓴 '경'(敬)자가 붉게 새겨져 있다.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의 첫 글자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소수서원의 교훈이자 학문의 목표이며 안향이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들여오고 전파한 의미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많은 서적과 교육에 필요한 자료를 들여와 유학의 진흥에 활기를 띠게 하고 이 나라 선비들에게 학문에 매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안향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주자학자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큰 역할을 담당한 대학자였다.
◆정도전'안향 선생 기념사업 추진
영주시는 조선왕조 500년의 초석을 다진 삼봉 정도전과 성리학 도입에 중추 역할을 한 회헌 안향 선생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10억여원을 들여 2018년까지 삼봉의 생가인 삼판서고택과 이산면 신암리 일대에 '정도전 기념공원'을 조성한다. 공원에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국 정신문화와 민본사상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 테마파크, 전통문화체험장 등이 들어선다.
또 올해부터 2018년까지 순흥면 소수서원 일대에 100억여원을 들여 '회헌사상연구소'를 설립한다. 이 연구소에서 회헌이 남긴 사상을 체계있게 조사하고 연구해 한국 전통문화를 계승한다는 방침이다.
영주 마경대 기자 kdm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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