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TV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 장면을 보면서 30여 년 전 고등학교 1학년 시절 학교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교무실 한쪽 구석에 꿇어 앉아서 손을 들고 있는 위로 학생주임 선생님의 꾸지람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간혹 교무수첩이 머리 위를 가격하기도 했다. 수업 태도가 나빴다는 이유로 교실에서 수업시간 내내 혼이 나고 결국 교무실까지 불려온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들었다가 교무실에서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냥 이 악몽 같은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 기다렸을 뿐이다. 그 사건 이후 나는 그 선생님을 피했다. 마음으로 존경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날 신임 총리를 비롯한 장관들을 앉혀 놓고 정치권을 향해 동원 가능한 언사를 총집결시켜 맹포화를 퍼부었다. 자신이 속한 새누리당 지도부를 향해서도 거침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리고는 콕 찍어서 유승민 원내대표에게는 더 이상 보고 싶지도, 같이 일을 하고 싶지도 않다는 투로 당장 그만두라는 뜻을 담은 '조준사격'을 가했다.
장관들 앞에서 엉뚱하게 국회와 국회의원들을 야단친 것이다. 그뿐 아니었다. 대통령의 표정 또한 일반 국민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음장 같았다. 혹자는 누구나 한 번 쏘이면 얼어붙고 만다는 박 대통령의 '레이저'를 보았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목소리를 현장에서 직접 들은 장관들의 몸과 마음은 그대로 얼어붙었을 것이다. 자신들을 향하지는 않았지만 최고권력자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특정인을 향해 쏟아지는 거친 말을 듣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고개 숙이고, 입 다물고, 대통령의 말씀만 받아 적을 뿐 달리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쥐죽은 듯이 있어야 자리라도 보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나 않았을까.
앞으로 당분간 정치다운 정치는 물 건너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뜩이나 대통령과는 각을 세우는 야당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자극을 하는데 가만히 있을 말랑말랑한 야당이 아니다. 네모 바퀴를 단 것 같은 국회가 잘 굴러갈 가능성은 그만큼 더 낮아졌다. 꾸지람을 배부를 정도로 얻어먹은 새누리당 의원들 역시 대통령의 한 말씀에 내심에서까지 수긍'추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승민 보호'에 다수의 비박(非朴) 의원들이 가세한 것은 대통령의 생각과는 다른 새누리당의 현주소다. 사정이 이러니 당청 관계가 대통령의 한 마디로 다시 매끄럽게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다.
대통령과의 소통은 더 어려워질 것 같다. 청와대 안에서도 몇몇 특정인들을 제외하면 직접 대통령을 대면하기도 어렵다지 않은가. 장관도 수석도 대통령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눠본 지가 오래라는 소문도 있어온 터다. 그런데 그날 대통령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가뜩이나 힘들다는 대통령과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놓아버렸을 법하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깨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관계에서는 원활한 소통이 있을 수 없다. 위에서 아래로의 하달만 있을 뿐이다.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고, 들어줄 것 같지도 않는다는 느낌을 받으면 종국에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고 입을 다물게 된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교사와 학생 관계에서도 그렇다. 대통령과 장관, 국회의원들이라고 다를 리 없다.
이날 국무회의는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는 자리였지만, 동시에 오래 비어 있던 국무총리 자리도 채워져 심기일전을 다짐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게다가 메르스 사태로 민심도 뒤숭숭하고 민생도 편하지 않은 때였다. 이런 자리라면 국민을 향한 위로의 말이라도 따뜻하게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런데 대통령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지난달 25일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했다는 그 말들은 때와 장소 그리고 내용에서도 모두 잘못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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