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거인들의 어깨

"내가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뉴턴이 '빛은 입자'라는 자신의 광학이론을 "색다를 것 없는 도용(盜用)"이라고 비판한 과학자 로버트 후크에게 보낸 반박문(1676년)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의 업적은 선배 과학자들의 유산 덕이라는 뜻이다. 한껏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혀 다른 뜻이 숨어 있다. 색다를 게 없다면 위대한 선배들에게 빚진 때문이지 당신 같은 이류과학자 덕이 아니라는 것이다.(로버트 후크의 작은 키를 우회적으로 조롱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말은 뉴턴의 '창조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조지 허버트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는 거인보다 더 멀리 본다."(1651년) 그리고 조지 허버트는 종교시인 로버트 버튼에게서 빌려왔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는 거인 자신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1621년)

어깨를 내어준 선인(先人)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버튼은 16세기 스페인 신학자 디에고 데 에스텔라에게서 빌려왔고, 디에고는 12세기 정치이론가 존 솔즈베리에게서 빌려왔다.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있는 난쟁이들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거인보다 더 많이, 더 멀리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시력이 좋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 신체가 뛰어난 때문도 아니다. 거인이 우리를 들어 올려 높은 위치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1159년)

이게 다가 아니다. 존 솔즈베리는 프랑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베르나르 샤르트르의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들과 같기 때문에 고대인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멀리 볼 수 있다"(1130년)는 말에서 인용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샤르트르가 이 문장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창조의 탄생' 케빈 애슈턴)

좋게 말해 인용, 나쁘게 말해 도용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표절로 비난받지 않는다. 중세 이래 너무나 잘 알려진 문구였기 때문이다. 신경숙 소설가가 비난받는 이유는 이와는 달리 꼭꼭 숨어 있는 다른 작가의 표현을 자기 것처럼 꾸민 데 있다. 그 문구가 '거인의 어깨'처럼 누구나 아는 상투적 문구라면 신 씨는 비난의 화살을 덜 받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신 씨가 그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위상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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