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 출신 아동문학가 이호철 선생의 작품집 중에 '늑대할배 산밭 참외서리'라는 동화집이 있다. 제목만 봐도 개구쟁이들의 해맑은 목소리가 골목골목 메아리치던 지난날의 농촌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그중에서도 '서리'라는 옛 풍습에 주목한다. '서리'란 여럿이 어울려 남의 농작물을 훔쳐먹던 일을 말한다. 요즘 같으면 당연히 '절도죄'에 해당하겠지만, 뉘 집 가릴 것 없이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더불어 순박하게 살았던 과거 농촌사회에서는 장난스러운 놀음이었다.
먹을거리가 귀했고 놀이문화가 번잡하지 않던 시절, 마을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감행하는 '서리'를 통해 군것질을 해결하고 심심파적을 달래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콩서리, 밀서리, 감자서리에다 참외서리, 수박서리는 물론 닭서리까지 용인되기도 했다. '서리'는 남의 것을 몰래 해먹어야 제 맛이었다. 단순한 주전부리 해결이 아니라, 모험과 긴장의 놀이문화가 곁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늑대할배 산밭 참외서리' 또한 산밭에 노랗게 익어가는 참외를 훔쳐먹기 위한 욕구와 늑배할배라는 두려운 파수꾼을 따돌려야 하는 난관이 묘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노지로 참외와 수박을 키우던 그 시절, 참외밭과 수박밭 언저리에는 으레 원두막이 있기 마련이었다. 원두막은 낮에는 땡볕을 피하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 역할도 했지만, 밤에는 서리를 막는 파수대였다. 그리고 파수꾼은 대개 잠귀가 밝은 할아버지의 몫일 때가 많았다.
잔별이 총총한 한밤중, 풀벌레 소리 자욱한 밭고랑에 납작 엎드려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참외나 수박서리에 열중하던 까까머리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이 든 할아버지가 재바른 아이들의 달음박질을 따라잡기란 애초에 불가능한데도 서리를 하다가 들킬 때면 "요놈들~!" 하는 고함소리가 금방 뒷덜미를 잡을 것만 같았다. 설령 붙잡힌다 해도 대개는 훈방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청송군이 교도소 빈터에 수용체험관 시설을 건립해 달라고 법무부에 건의할 예정이다. 또한 '서리'를 주제로 한 '도둑놈 축제'를 개최하는 방안까지 기획하고 있다. 다른 시군에서는 싫어하는 교정시설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기상천외한 축제를 열어 특산품을 홍보하려는 역발상이다. 가난했지만 인심은 좋았던 옛 시절의 향수를 안겨주면서, 죗값의 지엄함을 체험하게 하는 역설의 논리를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하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